대만 차(茶) 산업의 뿌리 다다오청을 가다

[서영수의 Tea Road] 전국에서 생산된 차 유통의 중심지…'차의 왕국'으로 불려

2018-12-07     서영수 차(茶) 칼럼니스트
대만은 대한민국 경상도 면적에 불과하지만 생산되는 차 종류가 다양해 ‘차(茶)의 왕국’으로 불린다. 중국 대륙에서 만들어지는 거의 모든 차가 대만에서도 생산된다. 차나무 수종이 다양하지 않지만 국토의 3분의 2가 산악지대라는 자연환경을 활용한 대만의 차는 반발효차인 청차(靑茶)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동북아시아에서 제일 높은 위산(玉山)을 필두로 해발 3000m 이상인 고산준령이 219개에 달하는 대만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서 차를 생산하는 고랭지다원을 보유하고 있다.  
대만 타이베이시 다다오청 지역의 뿌리 깊은 전통 차관인 진미다원 ⓒ 서영수 제공


1868년 처음으로 차 해외 수출 시작

대만은 아열대성 기후 지역이지만 고도에 따라 온대, 한대, 냉대 기후 특성을 갖고 있다. 다양한 기후대가 공존하는 산악지대 덕분에 생산지역에 따라 차 향과 맛의 편차가 크고 개성이 분명하다. 해발 1000m 이상에서 나오는 차를 고산차(高山茶)라 분류하고, 해발 1500m 이상에서 생산되는 차는 고랭차(高冷茶)로 표기한다. 타이중(臺中)현에 있는 리산다위링(梨山大禹嶺) 차구는 해발 2500m 이상 되는 고지대 원시림 사이에 다원이 조성돼 세계 최고 품질의 청차를 출시하고 있다.

대만에 야생 차나무가 존재했다는 설도 있지만 1796년 커차오(柯朝)가 푸젠(福建)성 우이산(武夷山)에서 차나무를 가져와 심었다는 것이 최초의 차나무 재배 기록이다. 대만은 223년에 불과한 짧은 차 재배 역사를 가졌지만 중국 대륙과 다른 독특한 차 문화와 활력 넘치는 산업 형태를 갖고 있다. 차를 분류하는 방법도 중국의 6대 차류와 달리 3종류로 단순하게 구분한다. 6대 차류에서 청차로 분류하는 반발효차를 모두 포종차(包種茶)에 포함시키고 불발효차인 녹차와 완전발효차인 홍차로 나눈다.

대만 차의 수출은 스코틀랜드 출신 존 도드(John Dodd)가 1868년 가공한 차를 뉴욕으로 보내 판매한 것이 최초였다. 대만 차 산업의 시작은 1881년 우푸위안(吳福源)이 타이베이에 차 제조공장을 세운 때라고 볼 수 있다. 대나무를 주원료로 약간의 볏짚을 섞어 만드는 거친 질감의 모변지(毛邊紙)를 사용해 차를 포장 판매하면서 포종차라는 명칭이 대만 청차의 대명사가 됐다. 그 당시부터 전국에서 생산된 차가 모여 유통되는 곳은 다다오청(大稻埕)이다.

다다오청은 단수이허(淡水河)에 있는 선착장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대만 북부 무역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 걸어 다니는 상가 사이를 예전에는 배가 드나들었다는 다다오청의 디화제(迪化街) 재래시장은 잘 보존된 청나라 시대 건축물을 상점으로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차 문화와 교역의 중심지였던 다다오청에는 1911년 10월10일을 건국일로 삼은 대만의 건국 역사보다 훨씬 더 긴 세월 속에 대를 이어 차 유통업을 이어오는 상점이 아직도 남아 대만 차 산업의 뿌리 역할을 하고 있다.

신세대를 위한 티하우스와 커피전문점도 많았지만 뿌리 깊은 전통차관을 우선 찾았다. 진미다원(臻味茶苑)을 운영하는 뤼리전(呂禮臻)은 15세 때부터 학교 대신 가업을 이어 차 농사와 제조유통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만차연합회 총회장과 세계 차 교류협회장을 역임한 뤼리전은 “대만의 봄 차는 향이 좋고 겨울 차는 맛이 좋다”는 설명과 함께 직접 만든 차를 맛보여줬다. 1970년대에 만든 우롱차에 이어 100년 묵은 귀한 포종차를 함께 시음했다.

단순한 찻잎이 아닌 100년이라는 세월의 깊이를 마시는 행복은 낯선 타국의 찻집을 집처럼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시간 여행자가 된 호사를 누리게 해 준 진미다원은 1851년 푸젠성 남부지역의 해안가옥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일본인 무역상 하야시아이다(林藍田)가 해적 침입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다다오청 초기에 3채를 나란히 지었다. 그중 한 채가 지금의 진미다원이다. 200년 전통의 도자기 마을 잉거(鶯歌)에 개점한 진미다원도 운영하는 뤼리전은 대만 차뿐 아니라 보이차(普洱茶)에도 조예가 깊었다. 


보이차 4대천왕으로 평가받는 동경(同慶), 동순(東順), 복원창(福元昌), 송빙(宋聘)이 생산된 중국 윈난성 이우(易武)향을 1994년 방문한 뤼리전은 이우향장 장이(張毅)를 만나 전통 보이차를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통 보이차를 만들 기술자를 찾기 어려웠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대륙을 지배하며 사유재산과 개인상호는 국가 소유가 됐었다. 4대천왕을 생산하던 차창 소유주와 기술자들은 해외로 이주하거나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이라는 광풍 속에서 정통 보이차의 명맥은 끊어졌었다.

1996년 이우를 다시 찾은 뤼리전은 장이와 함께 정통 보이차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보이차 4대천왕 중 하나인 송빙 제작에 실제로 참여했던 장관서우(張官壽)를 만난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장관서우의 가르침과 지도로 찻잎 채취부터 포장까지 전통 수공 제작기법으로 완성된 호(號)급 보이차가 수십 년 만에 탄생했다. 뤼리전이 만든 1996년판 진순아호(眞淳雅號)는 현재 1000만원을 호가하지만 진품을 만나기 어렵다.

뤼리전과 다음을 기약하며 진미다원을 나와 성업 중인 유기(有記)명차를 찾았다. 5대 장문 왕성쥔(王聖鈞)이 반갑게 맞이하며 유기명차에 대한 안내와 함께 역사에 대해 알려줬다. 손쉬운 전열기 건조를 피하고 숯불로 차를 말리는 전통공법을 고수하는 현장을 보여주며 차 품질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준 왕성쥔은 직접 차를 우려냈다. 푸젠성에서 건너온 왕성쥔의 고조부(高祖父) 왕징후이(王敬輝)가 1890년 창업한 유기는 다다오청에서 200여 개의 차장(茶莊)이 성업할 때 5번째로 허가받은 선발주자였다.
 

진미다원의 100년 묵은 포종차 ⓒ 서영수 제공


유기명차 5대 장문 왕성쥔, 젊은 층 겨냥 티백 출시

현재 4대와 5대가 함께 운영하는 유기는 40여 년 전 수출 부진으로 위기를 겪으며 수많은 차상들이 문 닫을 때 다행히 살아남아 도매 위주에서 소매로 판매전략을 전환했다. 수출이 잘되던 시절, 차 품질검사장으로 사용하던 건물 2층을 지금은 차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 푸젠성에서 유행하는 음악연주회를 열어 차를 즐기고 담소하는 공간 제공으로 차 문화를 전파하고 있었다.

5대 장문 왕성쥔은 젊은 층을 겨냥해 간편한 티백 제품을 출시하며 멋진 이름을 만들어냈다. 영어로 인조이(enjoy)를, 마신다는 중국어 인(飲) 발음을 활용해 인조이(飲joy)라고 작명해 대박을 쳤다. 차는 품질이 최우선이지만 가느다란 한 줄기 차향을 굳건한 백년기업으로 가꾸려면 트렌디(trendy)한 네이밍 작업과 신선한 홍보전략도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