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닛산 사태에 숨겨진 ‘전기차 패권다툼’
카를로스 곤 회장 추락 이면, 미래 먹거리 선점하려는 그들의 암투
전기차가 자동차 시장의 미래 먹거리라는 데엔 큰 이견이 없다. 전 세계 유수의 자동차 회사들이 전기차 개발에 뛰어드는 현실 또한 이를 방증한다. 그리고 최근 카를로스 곤 르노·닛산 회장이 일본에서 체포된 사건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시각이 있다. 일본 닛산이 전기차 분야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프랑스 르노와 기싸움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양사가 손을 맞잡은 르노-닛산 얼라이언스는 세계 전기차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올 상반기에 전기차 9만 7000여대를 팔아 글로벌 점유율 1위에 등극했다. 게다가 2016년엔 세계 최초로 양산형 전기차를 만든 미쓰비시도 힘을 보탰다. 닛산은 미쓰비시 지분 34%를 인수했다.
이들 3사 연합은 출범한 그 해에 “전기차 플랫폼을 통합해 가격을 낮추겠다”고 선언했다. 개별 브랜드의 정체성은 유지하되, 전기차 시장에서만큼은 한 몸처럼 움직이겠다는 목표다. 또 작년엔 “2022년까지 8개 이상의 전기차 모델을 생산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협력 체제 아래에서 전기차 기술 개발도 급물살을 탔다. 3사는 지난해 8000억 엔(약 7조 9200억원)을 R&D에 쏟아 부었다.
‘기술의 닛산’ vs ‘가성비의 르노’
이처럼 당장은 협력 관계 덕분에 시너지 효과를 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서로 갈라선다 해도 휘청이진 않을 것이란 예상도 깔려 있다. 둘 다 예전부터 전기차 분야에서 나름의 독자적 토대를 구축해왔기 때문이다.
닛산은 전기차 업계의 전통 강호다. 르노와 기술 협력을 맺기 전인 2010년에 이미 전기차 ‘리프’를 내놓았다. 이 차는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기차의 치명적 결함인 배터리 화재 사고를 한 번도 일으키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전기차이기도 하다. 업계에선 70년 동안 전기차 기술력을 쌓아온 닛산의 노력이 리프로 빛을 발했다고 보고 있다. 비록 1990년대 경영난으로 르노에게 지분을 내줬지만, ‘기술의 닛산’ 타이틀은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해 보였다는 분석이 따른다.
르노의 추격세도 만만치 않다. 2012년 출시한 ‘조에’는 2015~16년 유럽 최다 판매량을 기록한 전기차다. 3000만원도 안 되는 가격 덕분에 ‘가성비’로 호평 받고 있다. 무엇보다 전비(내연기관 자동차의 연비에 해당)가 강점이다. 1kWh의 전기로 9.7km를 달릴 수 있다. 전비가 5.1km인 리프보다 뛰어나다. 게다가 르노의 또 다른 모델 ‘트위지’는 1인승 초소형 전기차의 문을 연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양사가 전기차 분야에서 입지를 굳혀가는 사이 관련 시장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블룸버그가 발간한 ‘2018 뉴에너지파이낸스(BNEF)’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110만대가 팔린 전기차는 2025년에 판매량 1100만대를 찍을 것으로 예측됐다. 8년 만에 10배가 뛴다는 것이다. 또 2040년 전기차가 신차 판매에서 55%를 차지할 거란 전망도 뒤따랐다. 전기차를 둘러싼 각축전이 더 치열해질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이 와중에 11월19일 일본 검찰이 곤 회장을 보수 축소 등의 혐의로 체포했다. 이와 관련해 협력체제 속에서 힘을 키운 닛산이 각자도생을 추구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11월28일 “닛산이 르노와 결별해도 전기차 분야에선 닛산이 유리하다”면서 “아직 유럽은 디젤 차량 위주라 시장이 불리하다”고 주장했다.
“르노와 결별해도 전기차에선 닛산이 유리”
김 교수는 “과거엔 르노가 닛산을 경영난에서 구해줬지만, 이젠 닛산의 흑자 규모가 더 크다는 점도 닛산의 독립을 부추겼다”고 했다. 시가총액을 봐도 닛산이 훨씬 우위에 있다. 11월28일 기준 닛산 시가총액은 3조7998억 엔(약 37조 6700억원), 르노는 179억6100만 유로(약 22조 8400억원)를 기록했다.
전기차에 관한 유럽과 일본의 전략 노선이 다르다는 점도 배경으로 지목된다. 지난해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전기차 산업 경쟁력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완성차 업체는 순수 전기차 중심이다. 또 배터리 회사와 합작 법인을 설립하는 경향이 있다. 닛산이 현지 전기업체 NEC와 설립한 배터리 자회사 AESC가 그 예다. 반면 유럽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전기와 석유를 함께 사용하는 방식) 중심이며, 배터리 회사들과 공급 계약을 체결한다. 르노의 경우 LG화학에서 부품을 받고 있다.
다만 르노와 닛산의 동맹이 쉽게 깨어지진 않을 거란 반론도 있다. 르노 근무경험이 있는 이남석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11월28일 “그 동안 양사가 공동으로 운영해 온 분야들이 광범위하고, 도움을 받고 있는 건 닛산도 마찬가지”라며 “특히 전기차는 부품 공동구매나 플랫폼 공유 여부가 중요하기 때문에 두 회사가 합쳐야 유리하다”고 했다. 양국 정부도 결별론을 부인했다. 프랑스와 일본 경제장관은 11월21일 “르노와 닛산의 동맹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공동성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