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으로 벼락부자된 이들의 ‘엇갈린’ 삶
[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19화 - 1차 세계대전 종전 100년…벼락부자 전성시대
전쟁은 국가와 개인의 운명을 갈라놓기 마련이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군인 사망자는 1000만 명, 부상병도 2000만 명에 달했다. 참전국들의 전쟁 비용은 3000억 달러에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 인데다 막대한 군수 수요 덕분에 미국과 일본은 때아닌 호황을 누렸다. 게다가 두 나라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승전국 지위까지 얻어 '꿩 먹고 알 먹은' 격이 됐다.
요정에서 어둡다며 100엔 짜리를 불에 태워 구두 찾기도
특히 전쟁이 시작된 1914년 11억 엔의 채무에 허덕이던 일본은 불과 6년 만에 24억 엔의 채권국으로 돌아섰다. 이런 대반전 속에 해운, 섬유, 중화학 분야에서 신흥 벼락부자들이 등장했다. 그 중에서도 선박업자인 우치다, 야마시타, 카츠다가 큰 돈을 벌어 3대 벼락부자로 꼽혔다. '후네나리킨(船成金)'이라 불린 이들 가운데 우치다 노부야(1880~1971)란 인물이 단연 돋보였다. 1914년 그가 자본금 2만 엔, 선박 1척으로 설립한 우치다 기선은 3년 뒤에 자본금을 5백 배로 늘렸고 17척의 선박을 보유하는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그의 자산을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2조 원에 육박할 정도였다.
전후 불황이 닥치면서 많은 벼락부자들이 몰락했지만 우치다는 재빨리 재산을 현금화하는데 성공했다. 1919년 8월 그는 자신이 탄 열차가 전복되자 "나는 고베의 우치다다. 날 구해주면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라고 소리쳐 '돈 밖에 모르는 인간'이란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어찌됐든 막강한 재력을 앞세워 정계에 진출한 우치다는 1931년 만주침략으로 실권을 잡은 군부에 줄을 대 철도대신을 지냈고, 태평양전쟁 때는 농상무대신을 역임했다. 누구보다 침략전쟁에 앞장섰던 그는 패전 후 잠시 공직에서 추방됐지만 돈을 물쓰듯 하며 중의원에 당선됐고 다시 농림장관에 오르는 등 부와 권력, 명예 모두를 얻었다. 그가 지금껏 '눈치의 달인'으로 명성이 자자한 이유다.
또 다른 '후네나리킨' 야마모토 타다사부로(1873~1927)는 황무지 개척과 석탄, 목재 사업을 벌여 큰 성공을 거뒀다. 1차 대전 때 선박업에 뛰어든 야마모토는 현재 가치로 조 단위의 재산을 모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가 요정에서 어둡다며 '100엔 짜리를 불에 태워 구두를 찾은' 사실이다. 이 일로 그는 일본 교과서에 '졸부의 대명사'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 졸부가 1917년 '정호군(征虎軍)'이란 호랑이 사냥 원정대를 꾸려 조선 팔도를 누비고 다닌 바로 그 인물이다. 당시 "호랑이 잡고 러시아 곰 사냥가자"면서 대륙 침략의 호기를 부리던 야마모토는 중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한데다 전후 불황이 닥치면서 급속히 몰락하고 말았다.
전쟁의 여파는 식민지 조선으로도 이어졌다. 쌀과 콩을 선물거래하던 인천 미두(米豆) 시장의 쌀 거래량은 1918년 3000만 석을 넘었고 2년 뒤엔 그 3배를 웃돌았다. 덩달아 쌀값도 3년 사이에 3배나 올랐다. 1차대전 호황으로 일본의 쌀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때문이었다. 난데없이 떼돈을 벌게 된 미두꾼들 가운데 반복창(1900~1940)은 불과 4년 만에 지금 가치로 무려 400억 원을 벌었다고 한다. 겨우 21살이던 이 '투기의 신'은 미모의 신여성과 초호화 결혼식을 올려 경성을 떠들썩하게 했다. 하지만 얼마 후 쌀값이 폭락한데다 이혼까지 하는 바람에 '인생 역전'의 신화를 일찍 마감하게 되었다.
1차대전 중 미국은 막대한 군수물자를 유럽에 팔았고, 전후에는 천문학적인 복구비용 덕분에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뤘다. IBM, GM, 메릴린치, 팬암사가 글로벌 기업의 발판을 마련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른바 '전쟁특수'를 누린 미국인들 가운데 한인 이민자들도 여럿 있었다. 이들은 쌀, 과일 도매, 중국식품 유통 등 주로 농식품업으로 백만장자 대열에 올랐다. 그 중 김종림(1884-1973)은 1907년 미국에 이민 와 철도 노동자로 일하다가 곧 서부로 건너갔다. 당시 흔치 않은 벼농사에 뛰어들었는데 때마침 세계대전이 터져 쌀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15년 10만 평 남짓했던 농토가 불과 4년 만에 30배 넘게 불어날 정도로 그는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언론에선 김종림을 '백미 대왕'으로 불렀다고 한다.
첫 하와이 이민선을 탄 김형순(1886~1977)은 김호와 함께 털없는 복숭아인 신종 '넥타린' 묘목을 재배하고 이를 미국 전역에 판매해 큰 성공을 거뒀다. 두 사람이 설립한 킴 브라더스상회는 해마다 100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또 유일한(1895~1971)은 숙주 나물을 통조림으로 만들어 파는 라초이식품을 설립해 자산 200만 달러 규모의 회사로 키웠다. 이 때 번 돈을 밑천으로 1926년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이렇듯 1903년 하와이에 첫 발을 디딘 한인 이민자들이 불과 십수년 만에 큰 부를 쌓은 것은 전후 대호황에 힘입은 바 컸다. 하지만 이들이 그 부를 지켜낸 것은 무엇보다 한인 노동자들과 경제적, 정신적 '유대감'을 다진 결과로 여겨진다.
초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한인들은 하루 10시간씩 일하고 고작 54센트 품삯을 받을 정도로 착취에 시달렸다. 시간이 흐르자 고국에서 '사진 신부'를 데려와 가정을 꾸린 이들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미 본토로 이주했다. 캘리포니아 리들리의 '넥타린' 농장만 해도 200명의 한인 노동자를 받아들여 근로여건을 개선하고 임금도 후하게 쳐주었다. 그 후 농장이 120만 평 규모로 크게 성장한 데는 이처럼 한인 고용주와 노동자들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우리의 전통적 가치를 '공유'한 영향이 컸다. 안정된 가정을 이룬 한인 노동자들은 차츰 조국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919년 3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무려 7천명의 미주 한인들이 독립의연금을 냈다고 한다. 그 해 상하이 임시정부 재정의 절반 가량을 이들이 책임진 셈이었다.
흥미롭게도 미주 한인 백만장자들은 한결같이 조국의 독립전선에 뛰어들었다. '백미대왕' 김종림은 1919년 미주지역 전체 독립성금의 10%가 넘는 돈을 우리 임시정부에 보냈고, 노백린 장군이 주도한 윌로우스 비행사양성소 부지와 시설자금, 비행기 구입비용도 댔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50을 훌쩍 넘긴 나이에 주 방위군에 지원했고 두 아들도 미 해군에 입대해 세 부자가 일제 침략에 맞서 싸웠다. '넥타린 형제' 김형순, 김호도 미 전역을 누비며 미주 독립운동의 본산인 대한인국민회 지부를 만들었고 해방을 맞을 때까지 임시정부에 거액의 독립자금을 계속 보냈다.
100년 전,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美대륙의 한인 백만장자들
또한 유일한은 미주 한인국방경위대인 '맹호군' 창설을 주도했고 1945년에는 미국 OSS의 한반도 침투훈련에도 참여했다. 50살의 성공한 기업인이 '내 손으로 나라 찾겠다'며 목숨까지 내놓은 것이었다. 해방 후 굴지의 제약회사를 일군 그는 아들에게 "대학졸업 시켰으니 자립해서 살아라"란 유언을 남기고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필자가 보기에 당시 한인 거부들은 돈을 벌어 나라를 위해 썼다기 보다 '나라 살리기 위해 돈을 벌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만큼 나라 일이라면 피땀 흘려 번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썼다. 더욱 주목할 일은 네 사람 모두 사후 20~30년 뒤에야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사실이다. 평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아 뒤늦게 공적 사실이 밝혀진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되는 곳엔 사람들이 모이고 숱한 인생 역정이 펼쳐지기 마련이다. 일본의 배 벼락부자나 조선의 미두꾼 처럼 돈에 얽매여 천당과 지옥을 넘나든 인생이 있는가 하면, 돈에 휘둘리지 않고 '참된' 부자의 길을 고집한 삶도 있었다. 100년을 거슬러 한인 이민자들이 이룬 부의 궤적을 쫓다보면 "세상을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떠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란 랄프 에머슨의 말을 절로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