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박정희 탄신제·새마을운동테마공원에 엇갈린 구미 여론
널찍한 새마을전시관 그러나 채울 게 없다
11월14일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서 열린 박 전 대통령의 101번째 탄신제 현장.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눈에 띄게 발길이 줄었던 생가에 전국 각지 1000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모처럼 일대가 북적였다. 연중 가장 많은 방문객이 이곳에 모이는 날이다. 곳곳엔 박정희 전 대통령을 향한 축하와 그리움의 문구가 쓰인 현수막이 걸렸다. 하늘에 그와 육영수 여사 사진이 나란히 띄워졌다. 이철우 경북지사는 물론, 김진태·백승주·윤상현 자유한국당 의원과 조원진 대한애국당 대표 등 보수진영 인사들도 일찍이 자리를 메웠다.
탄신제는 전통 제례와 기념식 순으로 여느 해와 다름없이 진행됐다. 그러나 이날 방문객들 사이엔 이전 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행사 내내 흘렀다. 이들은 정부와 시에 한껏 날이 서 있었고 분에 가득 차 있었다. 탄핵 국면 후 첫 탄신제였던 지난해, 방문객들은 탄핵과 정권교체에 대한 속상함을 내비치면서도 생각을 드러내는 데 다소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이날, 방문객들은 앞다퉈 문재인 정부를 강하게 규탄하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을 적극적으로 외쳤다. 새로 취임한 더불어민주당 출신 장세용 구미시장의 행보에도 너나 할 것 없이 불만을 터뜨렸다.
이들은 장 시장이 10월26일 추모제에 이어 이날 탄신제에도 불참하고, 최근 지역 내 박정희·새마을 색을 지우려는 행보를 보이는 데 대해 비판했다. 70대 한 시민은 생가 입구에 놓인 박정희·육영수 입간판 앞에서 “이분들 덕에 우리가 배 안 곯고 살게 됐는데 정부와 구미시가 이분들을 지우려 한다”며 오열했다. 생가 한편에 놓인 방명록에도 문재인 대통령과 장 시장을 향한 거친 비난의 글이 적혔다. 탄신제를 주관한 박정희생가보존회 엄무용 사무국장은 “장 시장께서 행사 전날까지 참석 여부를 고민했다는데 지역의 반대 여론에 부담을 느낀 것으로 전해진다”면서 “아쉬운 마음이 크지만 내년부턴 참석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날 곳곳에선 일촉즉발의 충돌도 벌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민족 반역자’라고 쓴 피켓을 든 1인 시위자 주변을 태극기를 든 보수 지지자들이 에워쌌다. 지지자들은 “남의 잔치에 재 뿌리지 말라”며 거세게 항의했고 결국 경찰이 제지에 나섰다. 곳곳의 날 선 현장마다 셀카봉을 든 보수 성향의 1인 유튜버들은 주위를 돌며 연신 현장을 생중계하기 바빴다.
‘새마을’ ‘박정희’에 갇힌 879억 테마공원
탄신제를 마친 후 시민들의 발길은 생가에서 3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새마을운동테마공원으로 옮겨갔다. 2011년 첫 삽을 떠 지난해 말 완공한 이곳은 11월1일부터 시민들에게 임시개장한 상태다. 약 25만㎡(7만5000평)의 터에 879억원을 들여 조성한 이곳은 공사 전부터 과도한 예산 사용으로 지역 내 숱한 논란의 중심에 서왔다. 완공을 두 달 앞두고 있던 지난해 11월경 기자가 방문했을 때도 시공사인 STX의 사정으로 인건비가 체납돼 공사가 두 달 넘게 중단되는 등 끊임없이 잡음이 새어나왔다. 해마다 수십억원의 운영비를 부담해야 하는 탓에, 관리 주체를 두고 구미시청와 경북도청이 서로 떠넘기려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시내에서 만난 시민들도 “테마공원 대신 임대아파트나 공공의료원을 짓는 게 더 지역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역 내 시민단체들이 1인 시위 등을 통해 수년간 공사 무효화를 외쳤지만 아랑곳 않고 공사는 매년 조금씩 진행됐다. 이후 새마을운동 역사를 전시하고 홍보하는 기본적인 콘셉트만이라도 바꿔야 한다는 이들의 요청 또한 끝내 반영되지 않았다.
새마을기가 휘날리는 3층짜리 전시관엔 새마을운동을 주제로 한 5개의 전시실이 꾸려져 있다. 전시실 곳곳마다 새마을운동 노래가 울려 퍼진다. 각 공간은 새마을운동 초반의 모습을 재현한 ‘태동관’부터 현재 새마을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기관 및 단체들을 소개하는 ‘새마을사람들’관까지 새마을운동의 역사 순으로 이어져 있다.
전시관 한편엔 VR체험장도 마련돼 있다. 설치된 의자에 앉아 VR헤드셋을 쓰면 세네갈·에티오피아 등 새마을운동이 전파된 나라들의 모습을 소개하는 7분여 영상이 상영된다. 하루 8차례 VR영상이 상영되며 한 번에 8명씩 이용이 가능하다. 체험장을 담당하는 직원에 따르면, 평일엔 이용자가 적어 8번 미만으로 상영하는 반면, 가족 단위로 방문하는 주말엔 경쟁률이 제법 높다. 임시개장 후 전시관엔 평일엔 하루 평균 100~200명, 주말엔 500명 가까이 방문하고 있다.
관람객들은 대부분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새마을운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40대 이하 젊은 관람객 사이에선 혹평이 쏟아진다. 11월13일 궁금해서 들러봤다는 30대 전업주부 이지영씨는 “예상보다 더 허전하고 새로운 게 없어 실망했다”며 “이 넓은 공간에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작은 도서관이라도 하나 마련돼 있었으면 그나마 자주 왔을 것 같다”고 평가했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방문한 정아무개씨(38) 역시 “입장료가 무료라서 한두 번 정도 더 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이상 찾아올 곳은 아닌 것 같다”며 “지나치게 새마을운동이 찬양되고 있는 것 같아 불편하다”고 말했다.
테마공원을 담당하는 구미시청 역시 시민들의 평가를 수용하고 보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이라는 콘셉트에 갇혀 있는 한 넓은 공간을 더욱 다양한 콘텐츠로 채우기란 쉽지 않을 거란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시청 관계자는 “볼거리가 부실하다는 평가가 많은데 새마을운동 자체가 현재 활발히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한계가 분명하지 않으냐”면서 “어떻게 늘리려 해도 더 늘릴 내용이 없다. 기자님이 둘러봐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나”라고 반문했다.
메인 건물인 전시관 주변엔 세미나실·강당 시설 등으로 구성된 2개의 부속 건물(글로벌관·연수관)도 조성돼 있다. 공사 당시 새마을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각국 관계자들을 초대하고 새마을 교육을 진행하는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혀진 바 있었다. 그러나 각각 3층으로 이뤄진 널찍한 공간을 정확히 어떻게 사용할지 여전히 모호하기만 하다.
서로 운영을 떠넘겨왔던 구미시와 경북도의 지난한 싸움은 지난 9월, 이철우 경북지사가 “도에서 맡겠다”고 결정하면서 어느 정도 일단락된 듯 보인다. 현재 테마공원은 ‘도시공원’으로서 시장이 법적 관리권자가 된다. 따라서 경북도는 2년 내 이를 ‘문화시설’로 도시계획을 변경해 도지사가 직접 관리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구미시와 경북도는 도시계획 변경이 완료되기 전까지 2년 동안은 절반씩 운영비를 부담할 예정이다. 당장 내년부터 테마공원엔 인건비를 포함해 16억원가량의 운영 예산이 매년 투입된다. 적지 않은 예산에 비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은 전무하다. ‘세금 먹는 하마’가 될 우려를 안고 있다. 이에 대해 장진석 경북도청 새마을테마공원 TF 팀장은 “애초부터 수익 사업을 위해 조성된 공간이 아니었다”며 “도민들 사이에 일부 우려는 있겠지만 건물도 다 지어졌고 새마을운동 정신이 유네스코에도 등재되는 등 나름의 의미도 있기 때문에 향후 큰 갈등이나 문제가 되진 않으리라 본다”고 말했다.
박정희 역사자료관, 완공 전부터 애물단지
박정희 생가와 새마을운동테마공원 사이엔 현재 또 하나의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생전 유물들을 전시할 ‘박정희 역사자료관’이다. 박정희 기념사업에 꾸준히 반대해 온 지역 내 시민단체들은 테마공원 이상으로 심각한 애물단지가 바로 이곳이라고 지적한다.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구미 시민들조차 ‘과도한 신격화’라며 우려하던 사업이었다. 애초에 테마공원과는 별개로 남유진 전 구미시장에 의해 추진된 사업이지만 ‘새마을 벨트’라고 불리는 생가-역사자료관-테마공원의 허리에 위치해 있어 큰 상징성도 갖는다. 현재 40%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는 자료관은 예정대로라면 2019년 11월 정식 개장한다.
아직 문도 열지 않은 이곳이 문제로 꼽히는 이유는 역시나 과도한 예산과 부실한 콘텐츠에 있다. 김병철 구미 참여연대 사무국장은 “최근 구미시에 요청해 공사 현장 내부 견학을 다녀왔는데, 다녀와서 걱정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김 사무국장은 지난해 10월부터 한동안 구미역 등지에서 매주 역사자료관 건립 반대 서명운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사가 계속 강행됨에 따라 반대의 목소리를 잠시 줄이고 건립 과정을 주시하던 차였다. 내부를 둘러본 김 사무국장은 “생각보다 작은 공간을 합판 같은 칸막이로 나눠 놓았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니 향후 전시할 박 전 대통령 유물들이 그냥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사용했다는 의자들은 한구석에 쌓여 있고, 큰 의미 없는 접시 모양의 기념패나 볼펜 등 유물이라 하기 어려운 물건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며 “이 사업을 추진해 온 저들이 그리도 우상화하던 인물의 유물을 이렇게 방치해 놔도 되나 의아할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지역에 큼직하게 자리 잡고 수십억원의 예산을 쓰고 있는 ‘새마을 벨트’에 대한 장세용 구미시장의 부담은 클 수밖에 없다. 사실상 장 시장이 취임한 후 해당 사업에 대해 바꿀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이를 잘 알기에 구미 내 이를 반대해 온 시민단체 역시 구미시를 향한 문제제기 수위를 낮추고 지켜보는 추세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취임 후 장 시장이 보인 확실치 못한 행보에 대해선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
장 시장은 지방선거 때부터 기본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 우상화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유지해 왔다. 당선 직후 소감을 통해서도 “박정희만 바라보는 구미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보수 성향의 전임 시장들의 길을 따르지 않겠다는 각오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 일환으로 ‘새마을’ 이름을 내건 구미시 차원의 행사 명칭을 전면 변경할 것을 지시했다. 매달 시청 인근에서 열리는 ‘새마을 알뜰시장’이 ‘아나바다 알뜰시장’으로 명칭을 바꾼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장 시장의 행보에 대해 구미 시민들의 의견은 즉각 엇갈렸다. 기자가 박정희 생가 일대 및 시내에서 만난 시민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뚜렷하게 나뉘었다. 박정희 향수를 가진 장년층 시민들의 경우 대부분 강하게 반발했다. 구미에서 40년 이상 거주한 70대 이하영씨는 “공장들도 다 떠나고 지역 경제가 무너져가는 이럴 때일수록, 우리나라 경제를 이만큼 살린 박정희 정신을 더욱 새겨야 할 때”라며 “구미를 가장 대표하는 새마을운동 사업에 더 힘을 실어 여기서 수익을 내려고 해야지, 무조건 박정희 색깔만 지우면 되느냐”고 지적했다.
장세용 구미시장의 모호한 행보
젊은 층 시민들의 경우 일단 ‘박정희 도시’라는 구미의 이미지를 바꿔보겠다는 장 시장의 일성(一聲)에 동의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30대 시민 김옥희씨는 “전시관이나 추모제·탄신제 등에 들어가는 예산을 지역 발전을 위한 다른 방향으로 활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시장이 바뀐 후 아직 생각했던 것만큼 변화의 분위기를 느끼진 못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박정희 기념사업에 강한 제동을 걸어줄 거라 기대했던 지역 시민단체들 역시 장 시장이 양쪽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해 우왕좌왕 행보를 보이는 데 대한 답답함을 나타내고 있다. 실제 장 시장 측은 박 전 대통령과 관련한 취재진의 여러 질문에 “구체적인 입장을 내놓기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며 “향후 답변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거절했다.
특히 지역 시민단체들은 꾸준히 장 시장에게 요구해 온 시청 내 새마을과 폐지 논의에 대해 장 시장이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은 데 좌절하기도 했다. 김병철 구미 참여연대 사무국장은 “새마을과 폐지에 자유한국당 시의원들이 반발하자 장 시장은 바로 없던 일로 하겠다고 계획을 접어버렸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장 시장에 대한 기대를 상당부분 접게 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구미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존재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구미의 색이자 상징이었다. 지역의 모든 행사에 새마을 명칭이 붙는 일은 당연했으며, 이에 대한 반발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 그렇게 수십 년 세월을 자연스레 보내온 구미는 지금 과도기를 맞고 있다. 탄핵을 치르고 정권교체가 이뤄졌으며 최초의 민주당 시장이 당선됐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소수 의견은 구미를 사로잡던 기존의 관념과 대등하게 맞부딪치고 있다. 주요 길마다 이름 붙은 박정희로(路)와, 당연하듯 이름 붙은 각종 ‘새마을’ 행사, 대규모 새마을 벨트 등 당연했던 하나하나마다 치열한 내부 갈등을 겪고 있다. 스스로를 ‘박정희의 공을 인정하는 진보 성향의 구미 토박이’라고 소개한 택시기사 김병문씨(60)는 “구미가 이렇게 시끄러운 걸 보니 뭔가 바뀌고 있는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쪽에서 한발, 저쪽에서 한발 물러서면 지금 이 소란은 사실 별것 아닌 일”이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둘러싼 지역 내 갈등이 더욱 과열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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