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人 승부사 힐만 SK 감독의 ‘화려한 외출’
한국시리즈 제패 후 KBO리그 떠나는 트레이 힐만 SK 감독
일전에 김인식 감독이 ‘감독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새삼 생각해 보고 있다고 했다. 야구 감독을 비롯해 리더에게 필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다양한 답변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추진력, 용인술, 소통 등등. 그런데 김 감독은 그 모든 것을 통합해 딱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승부사적 기질이며 또 다른 하나는 선수단 관리다.
경기에서 최고의 덕목은 승리다. 팀이 이기기 위해서는 강한 전력이 우선이지만 그 전력을 필드에서 펼쳐지게끔 하는 이는 감독이다. 감독의 전술(배팅오더와 선발투수 기용 등)과 경기 중 임기응변(작전)에 따라 그 팀의 전력이 100% 발휘되거나 50%밖에 나오지 못하거나 한다. 더구나 프로야구는 한 경기만 하지 않는다. 단기 결전이라는 포스트시즌도 한국시리즈까지 고려하면 많게는 십여 경기를, 적게는 대여섯 경기를 펼쳐야 한다. 그 전체를 내다보는 감독의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 승부사적 기질이 없으면 “선수 역량이 너무 좋아 감독의 부족함을 메우지 않는 한 우승하기 어렵다”는 것이 야구계 중론이다.
다만 감독이 승부사에 그치면, 그 팀은 오래가지 못한다. 한두 시즌은 가진 전력을 모두 짜내서 우승 경쟁을 펼치는 팀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짜내는 데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그런 만큼 감독에게는 관리 능력이 요구된다. 선수가 다치지 않도록 선수 관리는 물론이고, 원활한 세대교체나 백업 멤버의 성장, 선수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도 감독의 역할이다.
상황 따라 숲과 나무 보는 유연한 전략
그것을 올해 제대로 보여준 이가 있다. 바로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SK의 트레이 힐만 감독이다. KBO리그에서 외국인 감독은 “승부수를 던져야 하는 단기 결전에는 약하다”는 미신이 있었다. 과거, 롯데 지휘봉을 잡았던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포스트시즌에서는 단 한 차례도 이기지 못해 그 미신은 사실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힐만 감독은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1차전에서 산체스를 1.2이닝 만에 내린 것을 떠올려보자. 4대3으로 한 점 앞선 상황에서, 그것도 3이닝이나 남은 시점에서 호투하던 산체스를 교체하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누구나 알 듯 단기전에서 1차전 승리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도 산체스를 일찍 내렸다.
플레이오프를 5차전까지 치르고 올라온 SK. 그런 만큼 투수진의 피로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정규 시즌에서 SK 불펜은 약점으로 거론될 정도로 견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에 빠른 공을 던지는 산체스는 한국시리즈만이 아니라 포스트시즌 내내 SK의 키 플레이어였다. 플레이오프에서도 3경기에 나온 것처럼 한국시리즈에서도 그의 활약이 필요했다. 그런 산체스가 1차전에서 길게 던지면 2차전에는 나오기 어렵다. 그래서 빠른 교체를 통해 2차전에도 내보낼 수 있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다. 어차피 2차전과 3차전 사이에는 휴식일이 있고, 켈리가 등판하는 경기는 ‘강제 휴식의 날’(외국인 선수는 한 경기에 2명만 나올 수 있다. 야수 로맥이 있어, 켈리가 선발 등판하면 산체스는 나올 수 없다). 1차전 승리에 ‘올인’하기보다 시리즈 전체를 내다봤다. 다만 이 전략은 산체스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뜻대로 되지 않았다.
6차전의 마운드 운영도 눈에 띈다. 선발 켈리에 이어 김태훈·정영일 등은 물론이고, 선발 자원인 문승원 등도 구원으로 내는 강수를 뒀다. 시리즈 전적 3승2패로 앞서 6차전을 져도 7차전이 있는 상황에서 ‘올인’ 전략을 펼쳤다. 단판 승부는 변수가 너무 많다. 단순한 실수 하나가 승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그래서 “단판 승부는 하늘에 맡겨야 한다”는 말도 있다. 7차전은 팀 전력을 총동원해야 하는 경기, 그렇기에 6차전에서도 배수진을 친 것이다. 1차전에서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기 위해 내일을 내다본 투수 운영을, 반면 6차전에서는 내일이 없는 야구를 펼쳤다. 힐만 감독의 승부수는 상황에 따라 숲과 나무를 보는 유연한 전략이 그 배경에 있었다.
선수단 관리 능력도 뛰어났다. 지난해부터 선수의 단점보다 장점을 살리는 지도 방식과 긍정적이며 도전적인 정신은 선수단에 강한 동기부여가 됐다고 한다. 그 속에서 박종훈·문승원·김태훈·정영일·김동엽 등 젊은 선수들이 가파른 성장세를 나타냈다. 젊은 선수 중용은 베테랑의 불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나주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젊은 선수의 출장 기회가 늘어나 확실히 베테랑의 경기 출장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다들 불만은 없다. 감독님은 모두에게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일방통행 아닌 소통의 리더십
힐만 감독은 선수를 기용하는 데 있어 이름값도 나이도 중요시하지 않는다. 단지 동등한 기회 속에서 그 기회를 잡은 선수를 쓸 뿐이다. 이는 포스트시즌에서 김강민·박정권 등 베테랑을 중용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적재적소의 용인술이다. 여기에 기용하지 않는 이유, 타순의 변화에 대해 선수들에게 일일이 설명해 준다. 휴식의 필요성과 상대 투수와의 전적 등 데이터를 언급하며 이해를 구한다. ‘나를 따르라!’는 일방통행이 아닌 소통의 리더십, 그것이 힐만의 야구다.
한 구단 지도자는 “힐만 감독의 시즌 운영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많았다”고 밝혔다. “시즌 초반에는 감독의 개입을 최소로 하며 있는 전력으로 경기를 치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6월 이후 슬슬 포스트시즌에 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번트나 도루 등 세밀한 작전을 내며 선수에게 임무나 역할을 줬다. 그것이 포스트시즌으로 이어져 치열한 접전 끝에 이기는 원동력이 됐다고 본다.” SK가 포스트시즌에서 때로는 한두 점 차이, 때로는 동점이라는 긴장된 상황 속에서 승리를 거머쥔 것은 이런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힐만 감독은 올 시즌을 끝으로 SK 지휘봉을 내려놓는다.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더할 나위 없는 결말을 쓰며, 외국인 감독은 승부에 약하다는 미신도 불식시켰다. 힐만 감독은 2년간의 화려한 외출을 통해 KBO리그에 긍정과 소통, 그리고 존중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