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문학은 여혐해도 되나?

현재가 변하지 않으면 과거가 대신 책임을 진다

2018-11-16     노혜경 시인

시인 김수영을 연구하면서 몇 해를 보냈다. 한국 시문학사의 가장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어낸 시인이지만, 최근 들어 김수영이 나를 괴롭힌 대목은 시의 난해성도, 그의 시가 지닌 정치성도 현대성도 아닌, “여성혐오의 혐의”였다. 특히 문제가 된 시는 ‘죄와 벌’이라는 제목이 붙은 시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빗대어 삶의 동반자인 아내(여편네)를 향한 복합적 태도를 드러낸 시다.  

 

도봉서원 아래쪽에 위치한 시인 김수영의 시비 ⓒ 연합뉴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살인을 한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이 등장하더니 곧바로 “그러나 우산대로/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라는 엄청난 반전의 진술이 이어지는 시다. 이 시는 그동안의 김수영의 문학적 위상을 흔들어버릴 수도 있을 만큼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표면에 드러나는 아내폭력의 언어를 여성혐오의 증거로 보느냐 또는 풍부한 함의를 지닌 시적 진술로 보느냐의 투쟁은 진행형이지만, 그러한 해석투쟁이 가능하다는 것이야말로 시의 역사가 시적 해석의 역사임을 말해 준다. 

 

시에서 살인이란 단순한 폭력이 아니고 존재의 파괴이며, 따라서 희생이란 부활의 예비다. 그러니, 남성의 종속물이 아니고자 하는 여성과의 투쟁에서 때려눕히기만 했을 뿐 살인을 못 한 시는 혁명에 실패한 시다. ‘그러나’ 김수영은 그 실패를 기록함으로써 성공으로 향한 길을 만들어주었다. 이 시는 여성혐오적이자 동시에 그 혐오의 원인(실패에서 기인한다는)을 보여준 시다. 이런 해석투쟁 자체가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투쟁을 이기고 살아남아야 하는 것 또한 문학의 사명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시대가 그러하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다른 언어를 말할 능력이 있었던 시인의, 닫힌 시대의 결과로서의 폭력성은, 바로 그러한 폭력성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기나긴 투쟁이 있은 지금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의 시 구절대로 ‘꽃은 열매의 상부에 피’고, 그는 애써 맺은 열매이며 미래에 사는 우리가 바로 꽃이니까.


“이미 죽은 것을 문학이라 부르다니…”

그런데 이 꽃에 서식하는 벌레들이 있다. 바로 지금 이 시대에도 제정신 못 차리고 여성에 대한 낡은 비유를 문학인 줄 알고 읊는 사람들이다. 오십 년 전에 쓴 시가 불려나와 재해석을 요구받는 시대다. 세상 변하는 줄을 모르면 이들 대신 이들이 자랑스럽게 시의 조상으로 일컫는 바로 그 과거가, 바로 그 정전(canon)이, 바로 그 전통이 비난과 부정의 대상이 된다. 남성들의 문학사를 다른 말로 ‘애비 죽이기의 역사’라고도 하는데, 그 아버지의 투쟁에서 배운 것이 없는 후배들을 과연 김수영이 자신의 미래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어디 시인들뿐이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복역하고도 그 경험을 과시하듯 소설로 써낸 소설가까지 등장한 사건이야말로 시대가 정말로 변했나 하는 의심을 하게 한다.

김수영을 해석의 역사 속에 머물게 할 때 그의 어이없는 폭력성은 문학이 된다. 그러나 해석의 그물망을 뚫고 나가지도 못할 여혐적 언어를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도 문학의 일부로 양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려 할 때는, 변화하는 시대를 인식하지 못하고 새로움을 보여주지 않는 당신들의 현재를 과거의 김수영이 뭐라고 할지 내 귀엔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이미 죽은 것을 문학이라 부르다니, 좀비 아닌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