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남자들이 페미니즘 때문에 탈출한다? “미친 소리”

[똑똑 대사관③] 필립 터너 주한 뉴질랜드 대사의 가짜뉴스 거르기

2018-11-16     조문희 기자

창문 너머 노랗고 빨간 단풍잎이 흐드러진 덕수궁 돌담길이 보였다. 옛 러시아 공사관 앞 건물 8층에 있는 주한 뉴질랜드 대사관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서양식 건물과 덕수궁이 낙엽과 어우러진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대사관 앞에는 마오리족을 형상화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벽을 따라 뉴질랜드의 총천연색 자연을 담은 풍경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 속에선 유럽계 백인과 마오리족, 동양인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그때 베이지색 양복에 주황 넥타이를 맨 필립 터너 주한 뉴질랜드 대사가 들어왔다. 대사는 ‘헬로(Hello)’와 ‘안녕하세요’를 번갈아 외치며 악수를 청했다. 호탕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와 자리에 앉은 그가 처음 건넨 말은 “이 풍경을 보라. 세계 어디를 가도 이런 풍경은 보지 못한다”였다. 그는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 대사다. 그는 지난 4월 주한 뉴질랜드 대사로 부임해 한국에서 8개월 남짓 생활했다. 1986년 외교계에 처음 발을 들였던 그는 2000년 뉴질랜드 최대 낙농기업인 ‘폰테라’로 이직해 유럽과 일본, 중국을 오가며 해외지사 업무를 맡았다. 이젠 기업이 아닌 정부를 대표해 뉴질랜드와 한국을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성소수자다. 터너 대사는 “내 파트너는 남성이고 24년간 함께했다”며 “올해 결혼했다”고 밝혔다. 인터뷰 내내 웃음을 잃지 않던 그였지만 한순간엔 정색했다. 기자가 한국에 퍼진 뉴질랜드의 페미니즘 이야기를 전한 때였다. 그는 “모두 터무니없는 루머이고 미친 이야기”라고 잘라 말했다. 그가 경험한 뉴질랜드는 어떤 나라일까. 그리고 그가 본 한국은 어떤 곳일까. 성소수자 대사를 통해 페미니스트의 나라, 뉴질랜드를 들여다봤다.

 
ⓒ 시사저널 이종현



 

오늘(11월6일) 서울 미세먼지 농도가 ‘나쁨’이다. 뉴질랜드와 한국은 공기부터 다를 것 같은데 적응하기 힘들지 않았나.

“(창문 밖을 보며) 오늘은 괜찮은 정도 아닌가. 지난봄 처음 한국에 왔을 때야말로 미세먼지가 최악이었다. 그런데 공기보단 더위가 힘들었다. 유일하게 적응하기 어려웠던 게 여름 무더위였다. 하지만 한국은 뉴질랜드 못지않게 아름다운 곳이다. 수천만 사람들이 이렇게 세련된 도시에서 사는 것은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일이다.”

뉴질랜드 관광객 규모가 해마다 꾸준히 늘고 있다. 그 매력이 뭐라고 보나.

“기본적으로 자연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까먹곤 하는데, 뉴질랜드는 아름답다는 찬사를 들어 마땅한 곳이다. 1200m 넘는 절벽 사이로 바다가 흐르는 밀퍼드 사운드(Milford Sound)나 눈 덮인 산 아래 들판이 펼쳐지는 알파인(Alpine) 산맥은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는다. 거기에다 양고기나 해산물 등 질 좋은 음식과 와인이 기다리고 있다. 어드벤처 활동으로도 유명하다. 뉴질랜드에선 세계 최초로 번지점핑을 시작했다. 또 루지(카트를 타고 땅의 경사와 중력만을 이용해 트랙을 달리는 놀이시설)의 시초다. 최근 경남 통영에 루지 트랙이 생겼는데, 뉴질랜드 기업이 투자했다. 지난해 문을 연 통영 루지에 270만 명이 다녀갔다더라. 뉴질랜드에선 다양한 모험을 즐길 수 있다.”

그중에서도 한국인에게 추천할 만한 여행지가 있다면.

“방금 말한 모든 걸 추천한다. 다만 한 곳을 콕 짚자면, 카리오타히(kariotahi)다. 뉴질랜드 북섬의 남서부를 따라 펼쳐진 긴 해변인데,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까만 모래가 넓게 펼쳐진 이곳에선 서핑을 즐길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주민들이 키우는 말이 해변을 거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반대로 뉴질랜드 여행객에게 한국 관광지를 추천한다면.

“경주와 통영을 꼽는다. 지난 10월 경주에 다녀왔는데, 정말 아름다웠다. 고전적인 미가 있었다. 또 통영엔 루지가 있다(웃음). 뉴질랜드 사람들은 루지를 정말 좋아한다.”

 
뉴질랜드 남섬에 위치한 밀퍼드 사운드는 1200m 높이의 바위 절벽 사이로 에메랄드 빛 바다가 흐르는 곳이다. ⓒ 뉴질랜드관광청 제공


“세계가 한국을 쳐다보고 있다”

서울은 어떤가. 너무 당연한 곳이라 언급하지 않는 건가.

“물론이다. 창밖을 보라. 고층 빌딩 옆에 궁이 있다. 뒤로는 산이 있다. 한 도시 안에 한 나라의 역사가 살아 있는 거다. 지난 주말 집 주변에 있는 북한산에 올랐다.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고 내려와 세련된 도시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세상 어느 곳에서 이런 경험을 한 도시 안에서 할 수 있을까? 서울은 정말 환상적이다.”

뉴질랜드에서 한국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세계적으로 한류가 주목받고 있는데, 뉴질랜드에서도 영향이 있나.

“뉴질랜드는 인구가 적고 작은 나라다. 그래서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뉴질랜드가 한류에 있어 주류 시장이 될 순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어린 세대는 한류에 죽고 못 산다는 점이다. 내 조카들만 해도 BTS에 열광한다. 거의 모든 뉴질랜드 대학에서 K팝 수업이 열리고, 매년 여름 웰링턴에선 ‘K-culture(케이컬처)’ 페스티벌이 열린다. 한국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도 정말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이보다 더 흥미로운 나라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세계가 한국을 쳐다보고 있다. BTS나 북한과의 관계 등 때문에. 1980년대 일본이 세계 최고 자리를 넘볼 때 나는 일본에 있었다. 2000년대 초 베이징올림픽이 열리고 모든 사람이 중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중국에 있었다. 부흥의 중심에 있었던 경험으로 볼 때, 지금은 한국의 시간이다.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게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뉴질랜드가 다시금 화제가 된 건 페미니즘 때문이다.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한때 ‘뉴질랜드 남자는 애완동물만도 못하더라’는 이야기가 퍼졌는데. 뉴질랜드 남성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크레이지’한 생각이다. 절대 아니다. 우리는 뉴질랜드의 인권 감수성에 대해 자랑스러워한다. 남성이 여성과의 싸움에서 진다는 생각은 정말 잘못된 거다.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건 기회의 평등이다. 남성을 끌어내리는 게 아니라, 여성을 비롯한 모든 약자를 끌어올리려는 거다. 남성이 지금껏 누렸던 것과 같은 기회를 여성이나 장애인, 소수민족, 성소수자 등도 누릴 수 있다면, 사회는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

‘페미니즘에 지친 뉴질랜드 남성들이 자국을 탈출한다’는 루머도 퍼졌다. 사실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우선 그런 걸 뒷받침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을 거다. 반대로, 많은 남성들이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뉴질랜드로 오고 있다. 한국에 이런 루머도 돌더라. 뉴질랜드에서 이혼을 하면 여성이 무조건 양육권을 가지고 남성은 양육비를 대야 한다는 것.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누가 돈을 더 많이 버느냐에 따라 재산이 나뉜다.”

인권문제에 있어 이렇게 진보적인 나라가 되기까지 과정이 험난했을 것 같다.

“물론 뉴질랜드에서도 저항이 있었다. 소수민족이나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싸웠다. 나는 올해 내 파트너와 결혼했는데, 뉴질랜드에선 최근(1997년)까지도 동성결혼이 불법이었다. 이런 변화가 옳고 그르냐를 따질 때 좋은 기준이 되는 건, 사람들이 이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 살고 싶어 하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어떠하든, 많은 이들이 뉴질랜드에 와서 살고 싶어 한다. 이게 팩트다.”

 
뉴질랜드 북섬에 위치한 타우포에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번지 점프대 위에서 강물을 향해 뛰어내릴 수 있다. ⓒ 뉴질랜드관광청 제공


뉴질랜드는 환경에 있어서도 진보적이다. 노동당 정부는 2035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100% 달성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한국에선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내세웠다가 유야무야된 분위기다.

“뉴질랜드는 운이 좋은 나라다. 수력이나 태양력, 풍력 에너지가 원래 풍부한 나라다. 지금도 생산 에너지의 90%가 신재생에너지다. 하지만 이런 뉴질랜드에조차 신재생에너지 확대는 버거운 문제다. 가스와 석탄을 사용하던 오랜 습관을 버리는 건 힘든 일이다. 기술이나 자원은 뒷받침되는데, 사회가 그 비용을 감당할 의지가 있는가가 관건이다. 어쨌든 뉴질랜드 정부는 2050년까지 탄소 배출 ‘0’에 도전한다는 목표가 분명하다. 잘 헤쳐 나갈 거다.”

한국에서 뉴질랜드 워킹 홀리데이 신청 시기가 되면 뉴질랜드 이민부 홈페이지가 마비되곤 했다. 그만큼 신청이 치열하단 얘긴데, 교류 규모가 늘어날 가능성은 없나.

“지금으로선 없다. 우리도 인기 있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이미 2015년 기존 1800명이던 교류 규모를 3000명으로 늘렸다. 더 이상 늘어날 가능성은 없다.”

대사로서 향후 계획이 어떻게 되나.

“뉴질랜드의 이미지를 업데이트하고 싶다. 뉴질랜드의 이미지는 보통 ‘클린(clean)’과 ‘그린(green)’, 아니면 ‘호빗(hobbit)’에 치우쳐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던(modern)’을 내세우고 싶다. 신기술, 혁신, 창의성과 같은 것도 뉴질랜드의 주요 가치다. 뉴질랜드엔 로켓도 있다. 이런 모습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거다. 또 한국과의 교류 규모를 모든 면에서 키우고 싶다. 뉴질랜드와 한국은 많은 걸 공유하고 있다. 태평양 지역의 보호를 위해 한국과 서로 더 긴밀하게 협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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