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르포①] ‘넥스트 차이나’ 변화하는 기회의 땅(上)
저렴한 인건비 기반 생산시장에서 풍부한 내수 갖춘 소비시장으로
“베트남은 세계에서 한국학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는 국가 중 하나입니다. 4년제 대학 기준으로 한국학과가 설치된 곳은 18곳에 달합니다.”
‘중국 대체시장으로서 베트남의 가능성’에 대한 사전조사를 위해 만난 관계자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한국학은 말 그대로 한국이라는 국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한국어를 비롯해 정치·사회·경제 등 모든 부문을 망라한다. 국내에서조차 비인기 학과로 분류되는 한국학의 수요가 유독 베트남에서 많은 배경에 대한 이 관계자의 설명은 명료했다. 바로 ‘경제’ 때문이었다. 한국은 베트남의 제1투자국이다. 그런 한국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한국학을 전공하려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한국학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은 양국 간 수교가 맺어진 1992년을 전후로 시작됐다. 선봉장은 철강 사업의 포스코와 신발 사업의 태광실업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삼성·LG로 대표되는 전기·전자 사업이 진출했다. 지금은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기업들 대부분이 베트남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들 기업은 베트남의 경제지표를 바꿔놓았다. 삼성전자 현지법인 한 곳의 매출이 베트남 GDP의 20%를 차지했을 정도다. 올해 상반기 매출은 현지 GDP의 31.5%에 달하기도 했다.
우리 기업은 그동안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생산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베트남에 진출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베트남 투자지형엔 변화의 조짐이 감지된다. 유통·식품·문화 등 소비재 사업 분야의 진출이 크게 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이 생산시장을 넘어 소비시장으로 각광받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변화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베트남의 경제 수도로 불리는 호찌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호찌민 떤선국제공항 입국심사대를 통과하자 기자를 반겨준 것은 효성과 신한은행의 광고판이었다. 한국이 베트남의 제1투자국이라는 점을 실감한 대목이다. 공항 밖 호찌민 시민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쳤다. 경제성장이 계속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이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현지 기업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실제 베트남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최근 20년간 매년 5%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나라다. 최근 3년 동안은 성장률이 6%를 넘었다. 전 세계 경제성장률의 2배에 가까운 수치다.
가처분소득은 특히 경제성장률 이상의 가파른 상승곡선을 보였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평균 35.5%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가처분소득은 소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실제 가처분소득 증가에 발맞춰 베트남의 소비는 매년 30% 이상 증가하고 있다. 전문가들이 베트남을 거대 소비시장 잠재성이 높은 국가로 분류하는 이유다.
이마트와 롯데마트, 경쟁적으로 베트남 투자
베트남 소비시장의 가능성은 신세계그룹의 이마트 고밥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2015년 12월 문을 연 베트남 1호점이다. 현재 호찌민 내 대형마트 가운데 매출과 방문객 수에서 1위에 올라 있다. 개점 첫해인 2016년 목표 매출의 120%(419억원)를 달성했고, 지난해엔 매출이 520억원으로 증가했다. 올해도 600억원 이상 매출이 기대되고 있다. 이마트 관계자에 따르면, 고밥점의 방문객 수는 평일 평균 1만 명, 주말에는 1만7000여 명에 달한다. 실제 오전 11시가 되자 이마트 매장은 장을 보기 위한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마트는 1997년 중국에 진출한 뒤 고전을 거듭하다 지난해 결국 철수를 결정했다. 중국을 대체할 시장으로 주목한 곳이 바로 베트남이다. 1호점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뒤 신세계그룹은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상태다. 3년간 투자액만 5500억원에 달한다. 천병기 이마트 베트남 법인장은 “중국 시장에 진출했다 실패한 경험을 밑거름 삼아 베트남 시장에서 성공모델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라며 “3년 내 6개 점포를 추가 출점해 이마트를 호찌민 내 최고 대형마트 브랜드로 성장시키고, 나아가 10년 내에 전국으로 점포를 확대해 베트남 1위 유통기업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때 중국 시장에 주력했던 롯데마트도 이젠 베트남에 사활을 걸고 있다. 롯데마트는 베트남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유통시장을 개방한 직후인 2008년 호찌민에 첫 점포인 ‘남사이공점’을 열었다. 현재까지 13개 점포를 운영 중이다. 롯데마트는 올해부터 베트남에 해외사업 역량을 집중키로 했다. 롯데그룹이 지난해 사드 보복으로 중국에서 1조원이 넘는 손실을 기록하고 중국을 대체할 시장으로 베트남에 주목한 것이다. 롯데마트는 2020년까지 중·소형마트를 포함해 점포 수를 87곳까지 늘려나갈 계획이다.
식품 분야의 베트남 진출도 본격화되고 있다. 지금도 베트남 내 마트에선 한국 식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국으로부터 수입해 온 것들이다. 현지에서 직접 생산하는 것은 조미료(대상)와 과자류(오리온) 정도다. 이런 가운데 CJ제일제당이 ‘케이푸드(K-Food)’ 현지 직접 생산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베트남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인프라 확보를 위해 현지 식품업체 3곳을 인수하기도 했다. 스프링롤 생산업체인 까우제(현 CJ까우제)와 해산물 가공식품업체 민닷푸드(현 CJ민닷), 김치업체 킴앤킴스(현 CJ킴앤킴스) 등이다.
CJ제일제당은 현재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향후 품목을 더욱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CJ제일제당의 주력 상품은 비비고 만두와 김치다. 비비고 만두는 이미 현지에서 상당히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김치의 경우 호불호가 강한 음식이지만 베트남 국민 인지도가 98%에 달하는 등 친숙도가 높아 성장 가능성이 큰 것으로 평가된다. 박찬주 CJ제일제당 식품동남아사업담당(상무)은 “함께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CJ대한통운을 통해 유통망을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라며 “단기적으로는 베트남 전역에서 성공을 거두고, 나아가 베트남을 생산기지로 동남아 전체로 사업 영토를 확장해 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극장 사업은 한국 기업들이 사실상 독점
문화 사업을 대변하는 극장 사업은 사실상 한국 기업이 독점하고 있다. CJ CGV와 롯데컬처웍스의 베트남 영화 시장 점유율은 63.5%에 달한다. 국내 기업들이 베트남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는 구도인 셈이다. 베트남 극장 시장에 먼저 진출한 건 롯데컬처웍스다. 2008년 베트남에 최초의 멀티플렉스를 오픈했다. 그러나 적극적인 사업 확장은 하지 않았다. 롯데 계열의 대형마트나 백화점이 오픈할 때 함께 입점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베트남 국민들의 가처분소득이 늘어나며 문화생활 향유에 대한 욕구가 커졌기 때문이다. 실제 베트남 영화 시장은 2013년 550억원 규모에서 지난해 1380억원까지 증가했다. 현재 40개 극장을 운영 중인 롯데컬처웍스는 2022년까지 극장 수를 80곳까지 늘린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CGV는 후발주자지만 현재 베트남 극장 사업자 1위에 올라 있다. 2011년 현지 영화업체인 ‘메가스타’를 인수하며 현지 영화 시장에 발을 들였고, 2014년 법인명을 ‘CJ CGV 베트남’으로 바꾸면서 본격적인 사업 확장에 나섰다. 현재 전국에 64개 극장을 운영 중이며, 2020년까지 80개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양사는 베트남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을 달리하고 있다. CGV는 프리미엄 전략을 펴고 있다. 4DX, 골드클래스 등 다양한 특별관과 고급 인테리어 등을 도입해 브랜드 고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것이다. 반면 롯데컬처웍스는 관람권 가격을 현지 극장 수준에 맞추는 등 베트남 국민에게 생소할 수 있는 극장의 문턱을 낮추는 데 주력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물론 기존에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들도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생산기지로서의 베트남도 여전히 건재하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것이 효성그룹이다. 효성은 그동안 호찌민시 인근 동나이성 연짝공단에서 스판덱스와 타이어코드 등 주력 제품을 생산해 왔다. 지금은 베트남 남부 바리아붕따우성에 폴리프로필렌(PP) 공장과 탈수소화(DH) 공정 시설 및 LPG 저장탱크, 중부 꽝남성에 생산기지 건립을 진행 중이다. 효성은 베트남을 기존의 스판덱스와 타이어코드 등 섬유와 산업자재뿐 아니라 화학·중공업 등 핵심 제품을 모두 생산하는 글로벌 전초기지로 키울 계획이다.
이외에 LG디스플레이는 지난해 베트남 하이퐁에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모듈 공장을 세웠다. LG이노텍은 베트남에 1496억원을 투자키로 했고, LG전자는 2028년까지 15억 달러를 추가 투자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코오롱인더스트리도 베트남 빈증성에 타이어코드 생산공장을 건립했다. SK그룹은 계열사 5곳이 공동 출자한 동남아 투자사를 통해 베트남 식품·자원기업인 마산그룹 지분 9.5%를 인수키로 했다. SK그룹은 현지 국영기업 민영화나 전략적 대형 M&A 등을 마산그룹과 공동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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