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와 일본의 밀월이 불편하게 다가오는 까닭

[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17화 - 안중근 의거일에 되짚어본 인도 무력항쟁

2018-10-22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前 KBS PD)

다른 나라의 식민역사를 살피다 보면 데자뷰 처럼 반복되는 일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 속에 우리 역사의 어느 대목이 연상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인도는 지리적 위치나 문화적 배경으로 볼 때 우리와 유사성이 많지는 않지만, 묘하게도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은 날이 8월15일로 같다. 또 1947년 독립을 이룬 후, 분단의 시련을 겪게 되었고 서로 전쟁을 치른 것까지도 닮았다.

여기에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저항한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간디는 반식민 항쟁사를 죄다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다 보니 간디의 비폭력 운동 외에 다른 투쟁 방식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땅덩어리가 크고 인구가 많은 데다 오랜 식민역사를 지닌 나라다 보니 실상은 치열한 무력항쟁이 펼쳐지기도 했다.

1909년 런던에서 영국 인도장관의 정치 고문인 커즌 와일리가 살해됐다. 인도 식민통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는 당시 영국내 인도 유학생들의 활동을 주시하며 정보망을 두고 있었다. 살해자는 런던대학에 유학 중인 마단 랄 딩그라(1887-1909)였다. 딩그라는 인도청년회의 멤버였는데, 이 단체는 인도의 완전한 자치를 위해 무장항쟁도 마다하지 않은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딩그라가 처형 직전에 남긴 글은 인도는 물론 영국 사회에 적잖은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당시 통상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은 "애국심이 이보다 더 숭고하게 표현될 수 있는가"라며 감탄했다. 그의 글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영국을 증오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저는 외국의 총칼에 억눌린 나라는 영원한 전쟁상태에 놓여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배워야 하고, 이를 가르치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같은 나라에 다시 태어나서 지금처럼 성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인도의 독립운동가 딩그라(왼쪽)와 그에 의해 피살된 커즌 와일리(1848~1909) ⓒ이원혁제공


100여년 전, '안중근 배우기'에 힘쓴 인도 열혈 청년들

딩그라 사건 석 달 뒤 안중근 의거가 일어났다. 두 사람의 거사는 몇 가지 닮은 점이 있다. 똑같이 1909년에 발생했고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벌어졌다. 또 피살된 두 사람이 식민정책의 책임자라는 사실도 공통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조선통감을 지냈고, 커즌 와일리는 식민지 인도를 또 다시 분열시키는 '벵골 분할' 정책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었다. 딩그라가 그를 표적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딩그라와 안중근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거사가 '테러'가 아닌 전시(戰時)에 행한 '군사적 행위'라고 주장한 점 또한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아울러 필자가 가장 눈여겨본 부분은 안중근 의거가 인도 의열투쟁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인도의 법률가이자 역사학자인 상카 고스 박사는 《인도 무력항쟁의 르네상스》란 책에서 '안중근 의거에 고무된 힌두 민족주의 청년들은 이토 암살에 대해 철저히 연구하며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사실을 획인했다'라고 적었다.

1900년대 초부터 인도에서는 영국인을 겨냥한 암살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벵골주에서만 총독, 부지사, 치안판사 등을 저격한 사건이 30여 차례나 벌어질 정도였다. 주로 10대 소년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이들은 애국심만 충만할 뿐 자신들의 행위를 뒷받침할 이론적 지식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찌보면 안중근은 이들의 무분별한 행위에 대한 정당성과 행동 방향을 제시하는 '가정교사' 역할을 한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독립전사 중 한 명이 일본에 인도식 카레를 전파한 사실이다. 벵골 출신인 비하리 보세(1886~1945)는 1912년 영국인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일본 우익 세력의 도움으로 도쿄 신주쿠에 있는 나카무라야 식당에 은거하게 되었다.

본래 인도 전통요리인 카레는 식민지 시절 영국에 전해졌고 메이지 시대에 서양문물의 하나로 다시 일본으로 보급됐다. 보세는 식당 주인에게 영국을 경유한 '양식' 카레가 아닌 뼈있는 치킨에 향신료를 뿌린 '순 인도식' 카레를 선보였다. 카레가 식당의 주된 메뉴로 채택됐고, 보세는 주인 딸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보세 부부의 인연에서 따 온 '사랑과 혁명의 맛' 레시피로 잘 알려진 이 식당은 100년이 넘은 지금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제국주의 침략과 무장 항쟁으로 점철된 아시아 독립투쟁사에는 이처럼 '애틋한' 에피소드도 숨어 있다. 

 
비하리 보세와 부인 토시코. 오른쪽은 도쿄 나카무라야 식당과 순 인도식 카레 ⓒ 이원혁제공


인도의 무장투쟁은 1915년 남아프리카에서 귀국한 간디가 '사티아그라하'라는 비폭력 운동을 전개하면서 차츰 사그라들었다. 그렇다고 그의 철학과 정신이 인도인 모두를 품을 수는 없었다. 간디에 이어 국민회의 의장을 지낸 수바스 찬드라 보세(1897~1945)는 무력항쟁주의자였다. 그는 인도 콜카타 대학을 차석으로 입학하고 영국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식민지 최고의 엘리트였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간디에게 무력봉기를 호소하지만 거부당하고 오히려 식민당국에 체포되었다. 가택연금 중 극적으로 탈출한 보세는 나치의 히틀러를 찾아가 지원을 요청하나 소련 침공작전에 여념이 없던 히틀러는 이를 거절했다.

이럴 때 '카레집 사위' 비하리 보세가 그에게 접근해 일본과 손잡을 것을 제의했다. 당초 인도는 일본의 관심 밖이었다. 대동아공영권이나 일본군의 작전 범위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데 태평양전쟁 때 영국령 말레이 반도를 점령한 일본군은 포로로 잡은 인도인 영국군 6만5000명의 처리 문제가 골치거리였다. 기회를 잡은 비하리 보세는 일본 정부를 설득해 이들을 인도군으로 편입시키고 그 수장에 올랐다. 허나 정작 인도군인들은 그를 일본의 '괴뢰'로 여기고 신뢰하지 않았다. 난처해진 보세와 일본 정부는 같은 벵골 출신이며 명망있는 지도자인 찬드라 보세를 영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제의 지원을 받은 찬드라 보세는 1943년 싱가포르에서 자유인도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는 인도인 포로를 중심으로 4만 5000명 병력의 3개 사단을 창설했다. 이렇게 조직된 '인도국민군'은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군과 함께 인도 본토로 진격했다. 두 망명객 보세의 꿈이 이뤄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임팔전투'에서 일본군이 영국에 참담한 패배를 당하면서 인도국민군도 와해될 지경에 놓였다. 이후 타이완에 머물던 보세는 1945년 8월 소련으로 망명을 꾀하다가 비행기 폭발 사고로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찬드라 보세(왼쪽 사진의 오른쪽 끝)와 일본의 아베 총리, 인도의 모디 총리가 손잡고 인사하는 모습 ⓒ 이원혁제공·연합뉴스


중국에 맞서 '역사연대'로 경제·안보 밀월시대를 여는 인도와 일본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 인도에서는 '역사 바로세우기' 논란이 뜨겁다. 2016년 인도 모디 총리는 "영국이 승전국임에도 서둘러 인도를 떠난 것은 간디가 아닌 인도국민군 때문이었다"란 내용의 영국 기밀문서를 공개했다. 또 네루가 독립영웅 찬드라 보세를 '전범'으로 지목한 기록도 발견돼 인도가 발칵 뒤집혀지기도 했다. 그동안 '성역'으로 여겨지던 간디와 네루의 비폭력 운동을 비판하고 무력항쟁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거세지는 형국이다.

우려되는 것은 이런 분위기를 간파한 일본 정부가 인도와 '역사 연대'를 부쩍 강조하고 나선 점이다. 인도를 방문한 아베 수상이 찬드라 보세의 후손을 따로 만나 “많은 일본인들이 올곧은 항쟁을 펼친 보세에 깊이 감명받았다”라고 추켜세우는가 하면, 인도국민군이 일본과 함께 싸운 점을 내세우며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10월 말 모디 총리의 방일에 맞춰 일본 자위대가 인도 육군과 합동훈련을 펼치기로 한 사실도 예사롭지 않다. 침략 전쟁을 마치 인도 해방을 위한 전쟁인 양 설쳐대는 일본의 행태는 혀를 찰 일이지만, 이런 '역사 왜곡'이 국제사회에서 먹혀든다는게 더욱 가슴무거운 현실이다.

오는 10월 26일은 안중근 의거 109주년이 되는 날이다. 제국주의 침략을 심판한 안중근 배우기에 '열공'했던 식민지 인도가 지금 일본의 군국주의 회귀에 편승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여간 불편하지 않다. 이처럼 뒤바뀐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다시 들춰 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