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특집①] 창립 110돌 한글학회가 웃지 못하는 이유

개혁파 “학회 비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반발…회장 “악의적인 음해”

2018-10-08     박성의 기자
“기득권을 지키려는 지도부의 만행이 극에 달했다.”(한글학회 정회원)


“엉터리 허위사실로 학회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다.”(한글학회 이사)


572돌 한글날을 앞두고 한글학회에 파열음이 일고 있다. 이사진의 선출 방식과 회원 자격 등을 놓고 학회 지도부와 일부 정회원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어서다. 집안싸움이 격해지는 사이, 한때 국내 학술단체의 상징과도 같던 한글학회의 위상과 명성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정부의 지원도 ‘뚝’ 끊긴 가운데, 한글 보급에 힘을 쏟자며 한글학회를 세웠던 주시경 선생의 바람도 위태로워졌다.

 
10월1일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국립한글박물관에서 관람자들이 《훈민정음》 해례본 영상물을 감상하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이사 선출 방식 두고 발생한 ‘잡음’


한글학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학술단체이자 가장 오래된 학회다. 학회의 뿌리는 1908년 8월31일 주시경과 김정진 등 당대 지식인들이 문맹을 깨치고 나라의 주권을 지키고자 세운 ‘국어연구학회’다. 국어연구학회는 이후 1911년 배달말글음, 1912년 한글모, 1921년 조선어연구회, 1931년 조선어학회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광복 뒤인 1949년 지금의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꿨으며 올해로 창립 110돌을 맞았다.


한글학회가 긴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모임에 몸담은 학자들이 한글 연구뿐 아니라 한글 보급 활동에도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학회의 맥을 이어온 주시경의 제자들은 국어학을 연구하는 한편, 우리말을 지키는 선봉대 역할을 자처했다. 식민지 시기에는 목숨을 걸고 우리 말글을 적극적으로 알리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 덕에 한글학회는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민족학회’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100년 넘게 한뜻으로 한글을 수호하던 한글학회지만, 최근 학회 내부 기류가 심상치 않다. 학회에 몸담고 있는 학자들 간에 비방이 오가는 등 조직 갈등이 점차 표면화하고 있어서다. 다툼의 발화점은 이사회다. 한글학회는 1988년 이후 약 30년간 이사회(11명)를 간선제로 꾸려왔다. 정회원 중 선출된 평의원들이 추천한 인사가 이사 직함을 달았다. 그런데 이를 두고 일부 정회원들이 ‘고인 물 인사’ ‘코드 인사’ ‘지역 편향적 인사’라는 비판을 쏟아내면서 잠잠하던 학회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한글학회 회칙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학회 정회원은 임원(이사·회장) 선출권이 없었다. 대신 이사회가 평의원 추천의 전권을 가졌다. 이사가 평의원을 추천·선출하게 하고서, 그 평의원이 이사를 다시 뽑게 했다. 한번 뽑힌 평의원의 임기 제한은 없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글학회 소속 교수는 “일반 정회원이 자칫 잘못해서 이사들 눈 밖에라도 나면 평의원이 되기 매우 어렵다”고 밝힌 후 “이사들 중 상당수가 동향(同鄕)이며, 수십 년 가까이 이사 직함을 달고 있는 인사도 있다. 그렇다 보니 자기들끼리 친목이 매우 두텁다. 이 상황에서 이사회 결정에 반대 입장을 내거나, 유독 튄다는 인상을 풍기는 이들은 점점 더 학회에서 밀려나게 된다”고 주장했다.


학회 운영체제에 불만을 품은 일부 정회원들이 1인 시위에 나서는 등 내부 반발 기류가 확산하자, 이사회는 지난 7월 평의원 선출 규정을 변경했다. 변경된 규정에 따르면, 한글학회 평의원은 회원총회에서 직접투표로 뽑되 회원마다 10명 이내로 투표하도록 했다. 평의원을 뽑는 과정에서 정회원의 목소리도 일부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이사회가 선출 규정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회원총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았다는 비판이 또다시 제기되면서, 이사회를 둘러싼 갈등은 결국 봉합되지 못했다.


한글학회 지도부와 정회원 간 갈등이 계속되는 사이, 한글학회의 위상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한글학회가 이사회와 개혁파 간 알력다툼으로 몸살을 앓으면서, 새내기 국어학자들이 학회 가입을 꺼리고 있어서다. 과거 한글학회는 변화와 계몽을 선도하는 ‘진보적인 조직’의 성격을 띠었다면, 최근 들어서는 연구에 방점을 찍은 ‘보수적인 조직’의 색채가 더 강해졌다는 게 젊은 학자들의 중론이다.

 
ⓒ pixabay


 

쪼그라드는 학회 규모에 가입 문턱 낮춰


서울의 한 대학에서 우리말 관련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최윤호씨(가명)는 “(국어) 관련 학계가 굉장히 좁다 보니 한글학회에 소속된 교수들의 성함이 모두 낯이 익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스승들이 많지만 학회까지 가입해야 할 명분은 찾기 어렵다”며 “같은 학자라도 세대 차이가 존재할 수 있고 지향하는 가치도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의 한글학회는 나이 든 학자들이 주를 이루다 보니 젊은 학자들이 가서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학회의 위상을 판가름하는 정회원 수도 제자리걸음이다. 한글학회 정회원 수(그해에 회비를 낸 회원 기준)는 △2012년 129명 △2013년 192명 △2014년 149명 △2015년 175명 △2016년 189명 △2017년 158명이었다. 한글학회 한 정회원은 “2013년과 2016년에는 임원선거가 있던 해였다. 회비를 내야 투표가 가능하기에 (정회원 수가) 잠시 늘어났던 것”이라며 “(한글학회가) 전성기를 이뤘던 시기에는 정회원 수가 지금의 3배를 넘었다”고 귀띔했다. 


일각에서는 한글학회가 ‘민족학회’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린 탓에 정회원 수가 늘지 않는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한글학회가 정회원으로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자격을 지나치게 좁혀놨다는 얘기다. 실제 한글학회는 2006년부터 최근까지 정회원 자격을 ‘국어학·언어학이나 국어교육학 논문을 발표한 실적이 있는 이’로 제한했다. 국어학이나 언어학과 관련된 논문을 발표한 학자만 정회원이 될 수 있었다. 이 탓에 한글 보급에 이바지한 비(非)국어 전공자나 시민운동가들은 한글학회에 지원서류조차 낼 수 없었다. 


이를 두고 한글학회 일부 정회원들은 “한글학회가 학술모임으로만 성격을 제한하려 하는 것은 한글 보급운동을 병행했던 주시경 선생의 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학회는 지난 6월 총회를 열고 10년 넘게 유지해 온 정회원 자격 장벽을 낮췄다. 새 회칙은 ‘우리말과 글의 교육·보급에 뚜렷이 이바지한 실적이 있는 사람’도 정회원이 될 수 있게 했다.

 
2018년 2월14일 박용규 교수 1인 시위 모습 ⓒ 박용규 제공


 

한글학회 “개혁파의 주장은 악의적인 음해”


한글학회의 위기를 두고 평가는 엇갈린다. 우선 한글학회가 처한 상황을 냉정히 되짚어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밀려드는 외래어와 외국어의 범람 탓에 내홍이 해결된다고 해도 한글학회의 위기가 단번에 타파되기는 어렵다는 주장이다. 다만 학회 개혁파의 주장대로 학회 지도부가 학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펼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과연 한글학회의 꼬인 실타래는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할까. 학계와 시민단체에서는 정부가 한글학회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온다. 대한민국의 상징과도 같은 한글을 보호하는 단체니만큼, 정부가 직간접 지원을 확대하는 등 학회 부흥에 기여해야 한다는 얘기다. 점차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한글학회를 다시금 양지로 끌어내려면, 정부의 조력이 필수적이란 것이다. 실제 한글학회는 민간 학술단체로 분류되는 터라, 이명박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고정적인 지원금은 일절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 학회 운영비는 학회가 보유한 건물 등에서 나오는 임대수익, 회원 후원비 등으로 충당하고 있다. 


현재 한글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권재일 전 국립국어원장은 10월2일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한글학회는 노력이나 예산을 투입한다고 바로 성과를 낼 수 있는 단체가 아니다. ‘외국어 그만쓰기’ 운동 등을 홍보하고 매달 글도 발표하고 있지만 학회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이어 권 회장은 정부보다는 언론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 지원이 없다고 하면 자칫 (학회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데 문제가 없는 상황으로, 학술회 등이 있을 때는 문화체육관광부 등으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고 있다. 물론 연 단위의 큰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면 분명 보탬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부 정회원들이 제기하는 ‘한글학회 위기론’에 대해서는 강한 불쾌감을 표했다. 권 회장은 “국내 어느 학회를 둘러봐도 정회원들이 (직선제로) 임원을 뽑고 하는 곳이 없다. 이를 두고 마치 한글학회만 특이하게 (간선제로) 선출하는 듯이 말하는 것은 악의적인 음해로 대응할 가치가 없다”며 “특정 지역 출신들만 이사진에 많이 들어가 있다는 주장도 말이 안 된다. 학회가 생겨난 그때부터 해당 지역 인사들이 많이 들어와서 그런 것이고, 그 외 지역의 지부는 새 회원을 받는 것조차 애를 먹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권 회장은 “그런(개혁을 주장하는) 회원들은 소수로, 대부분의 회원들은 그들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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