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영국 정의당 경남도당위원장 “노회찬은 국민의 소유물”
[인터뷰] 노회찬재단 설립 추진 나선 여영국 정의당 경남도당위원장
노회찬 정신이란.
“고 노회찬 의원의 존재가치는 돌아가신 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정의당 당원들도 비로소 그의 큰 정치적 존재감을 느끼고 있다. 6411번 버스 연설은 그의 발자취를 들여다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손을 내밀 때 정작 그분들 곁에 진보 세력이 없었음을 그가 지적했다. 당 대표로서 당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민중들과 호흡을 함께 하며 진보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연설이었다. 진보 정치인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자세를 일깨운 말이었다.
그는 항상 진보 정치의 성공만이 우리나라 사회와 국민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의로운 복지국가의 꿈, 그 자체가 노회찬이 꿈꾼 진보정치다. 하지만 그는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늘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맞춰 자신만의 정치를 실현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진보 정치인 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인의 교본으로 추앙받는다. 그 어느 누구도 그의 존재를 넘어서거나 대체할 수 없다.”
노회찬재단 설립이 추진되고 있다. 그 배경과 과정은.
“재단은 오로지 진보 정치 한길만 걸어 온 그의 삶을 조명하고 공유한다. 그가 고교시절 시작한 유신반대 운동부터 쭉 펼쳐 온 정치적 흔적을 기록한다. 또 그의 숱한 어록 등을 정리해 정치적 교본으로 만든다. 이를 통해 그의 바른 정치, 정의로운 정치를 널리 알려 제2, 제3의 노회찬을 양성할 계획이다.
사실 그는 정의당의 소유물이 아니다. 국민 모두의 소유물로 이전됐다. 그래서 재단 설립은 정의당 보단 다수 국민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실제 재단 설립 제안자 18명 중 정의당 소속 인사는 단 2명 뿐이다. 유족과 학창시절 친구들, 노동운동 동지들, 많은 시민들이 대부분이다. 재단 설립 제안은 앞서 49제 날인 9월9일 있었고, 그의 의원사무실 보좌관 2명이 지금 재단 설립 실무를 맡고 있다. 내달 안으로 준비위원회가 꾸려져 전 국민을 대상으로 재단 회원 가입원서를 받을 예정이다.”
노 전 의원이 경남에 남긴 흔적은.
“창원의 민주노총 노동회관 건립에 4억8000만원의 예산이 필요했다. 최근 그가 예산을 확보했는데, 그 의정활동이 생전에 그의 마지막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 인사들은 노동회관에 표지석을 세워 그를 추모하자고 이야기한다.
또 그는 창원지역의 도시가스요금 인하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지역구 첫 사업이었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그는 큰 정치를 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지역에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저런 것도 하는구나’라는 반응이었다. 큰 정치 뿐만 아니라 생활 정치도 굉장히 익숙한 분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흔적은 시민들 가슴속에 ‘참 진보 정치인’으로서 폭 넓은 활동이 아닐까.”
노 전 의원이 창원 성산구에 출마한 과정은.
“1980년대 후반까지는 그와 몇 차례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와 결정적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한 건 2002년부터다. 당시 지방선거를 앞두고 금속연맹 조직을 중심으로 지역 정치사업을 펼칠 때다. 금속연맹 조직부장을 맡고 있던 내가 정치실천단 발대식의 정치 교육 강사로 그를 초빙했다. 그는 30여 분 동안 특유의 화법으로 좋은 강의를 했는데 그 때부터 그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후 2015년 10월28일 내가 창원미래연구소를 만들면서 출범식 강사에 그를 또 초빙했다. 그날 저녁 그와 술잔을 기울이면서 창원 성산구 총선 출마를 처음 권유했다. 결과적으로 2016년 2월1일 그가 창원시청에서 창원 성산구 총선 출마를 공식 발표했지만, 그 과정은 지난했다. 특히 2016년 1월28일 그는 나한테 ‘어렵다’고 전화도 했던 터였다. 그 다음날 첫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1박2일을 함께 하면서 출마를 설득했다. 그가 원외에 남아 있는 자체가 큰 손실이란 점과 권영길 전 의원 이후 보수당에 빼앗긴 지역구의 탈환, 영남지역 진보 벨트 복원에 앞장서달라고 무릎을 꿇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결국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문자로 통보해왔다.”
20대 총선 과정에서 노 전 의원이 악전고투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당시 난 상임선대본부장을 맡으며 매일 그의 동선을 챙겼다. 어느 날 아침, 그가 갑자기 호흡이 가빠서 일찍 귀가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본 선거를 몇 일 앞둔 다급한 시기였다. 급히 그를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받았더니 폐에 구멍이 생겼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와 상의한 끝에 수술을 받고 선거 운동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때부터 선거 운동 기간 내내 폐에 호스를 꼽고 피 주머니를 옆구리에 찬 채 활동했다. 그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이를 악물고 선거를 치뤘다.
선거 당시 하루는 지역 변호사 한 분이 가족상을 당했다. 당시 난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묵념으로 예를 드리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옳지 않다’며 끝내 절을 했다. 그와 내가 절을 하고 일어나는데 그만 피가 역류하고 말았다. 두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피를 동시에 양말로 닦았다. 하(깊은 탄식).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 선거를 치뤘고 불행히도 최근 문제가 된 돈 사건도 그 시기에 일어났다. 당시 그가 병원에 7~8일 입원했는데, 몸이 아파서 그 돈을 회계처리하지 못 한 게 한(恨)이 돼버렸다.”
노 전 의원의 창원 성산구 출마를 자기 희생으로 보는 이유는.
“그의 정치 진로를 완전히 바꾼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사실 수도권에선 선거에 실패하더라도 재기의 기회가 많지만, 지방에선 외통수에 걸릴 수 있다. 만약 지방에서 낙선하면 정치적 생명이 끝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을 우려한 듯, 그의 주변에선 향후 정치 일정을 감안해 창원 성산구 불출마를 종용했다. 하지만 그는 한 석이라도 더 얻어 제도권에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 창원 성산구는 진보 정치의 상징적인 곳인 만큼 재탈환에 대한 그의 의지도 강했다. 결국 그의 20대 총선은 서울시장 도전 등 큰 그림을 포기한 자기 희생의 결정이었다.”
노 전 의원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나.
“그는 늘 ‘때를 놓치지 말라’고 강조했다. 덩치가 작은 소수 정당은 현안에 그때그때 목소리를 던져야 한다고 했다. 또 ‘어떻게 하면 내 주장을 잘 전달할 것인가’를 늘 고민하라고 주문했다. 절대로 맥없이 주장하지 말라고 했다. 포용력을 발휘할 것도 가르쳤다. 정의당이 특정 인사에 휘둘릴 정당이 아닌 만큼, 입당을 원하는 인사들을 널리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내가 부족한 면을 아프게 지적했다.”
내년 4월 보궐선거엔 누가 정의당 후보로 나서나.
“현재 언론에선 그의 부인인 김지선씨와 내가 거론되고 있다. 사실 난 김지선씨한테 아직 한번도 의중을 물어보지 않았다. 언론에서 이래저래 거론만 하는 상황이다. 만일 김지선씨가 출마를 결심한다면 최우선 후보로 고려돼야 한다. 난 과감히 양보하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가 출사표를 던질 생각이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동고동락을 해온 터라 부족하지만 그의 정치 철학과 신념을 이어 받을 자신이 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그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 한명이기 때문에 당원들의 뜻을 모아서 도전해 볼 각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