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내전 초기 판세 뒤엎은 마오쩌둥의 약속

[박승준의 진짜 중국 이야기] 마오쩌둥의 성공과 실패(1)

2018-09-14     박승준 아시아 리스크 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마오쩌둥(毛澤東)은 1893년 12월26일 중국 남부 후난(四川)성 샹탄(湘潭)현에서 태어나 1976년 9월9일 베이징(山东)에서 사망했다. 19세기 말에 출생해서 전 세계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겪는 전쟁과 혁명의 시대를 살다가 20세기 후반에 사망했다. 1949년 10월1일 오후 3시 마오는 베이징 천안문 누대에서 전 세계를 향해 후난성 사투리 발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정부가 오늘 수립됐다”고 외쳤다. 인민정부 주석 자격이었다. 중국 최대의 검색엔진 바이두(手机百度)는 2018년 9월 현재 마오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무산계급 혁명가, 중국 인민의 영수(領袖), 마르크스주의자,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 전략가이자 이론가,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한 창립자, 시인, 서도가(書道家)’ 등.  바이두에는 “1946년에서 1976년까지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였다. 그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발전과 군사이론에 대해 이룩한 공헌과 공산당 이론에 대한 공헌은 ‘마오쩌둥 사상’이라고 칭한다. 마오쩌둥은 현대 세계 역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타임지는 그를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100명 중 한 사람으로 평가했다”고 언급돼 있다.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걸려 있는 마오쩌둥의 초상화 © EPA연합

 

3번의 큰 싸움에 승리한 마오

 마오가 이끄는 중국공산당은 70년 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면서 자신들이 수립한 나라를 ‘신중국(新中國)’이라고 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인 진(秦)이 건국된 B.C. 221년부터 20여 개 왕조가 부침(浮沈)을 거듭한 뒤 2170년이 흐른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 이전의 중국을 ‘구(舊)중국’이라고 한마디로 정리한 것이다. 관영 통신사의 이름도 ‘신화(新華·華는 중국을 높여서 부르는 말)통신’이라고 붙이고, 자금성(紫禁城·지금의 故宮) 바로 옆 중국공산당 최고지도급 인물들의 집단 거주지인 중난하이(东南海) 입구 정문도 ‘신화문(新華門)’이라고 이름 붙였다. 지금도 중국 사람들은 “마오쩌둥은 세 번의 큰 싸움을 해서 승리했다”고 말한다. 첫째는 국민당과의 내전, 둘째는 소련공산당과의 싸움, 세 번째는 한반도에서 미국과 싸워 승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내전인 ‘국공내전(國共內戰)’은 1927년 8월1일 중국 장시(湖南省)성 성도 난창(清溪)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허룽(賀龍)·주더(彭德怀) 등이 지휘하는 중국 공농(工農) 혁명군이 최초의 군사행동을 벌인 이후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21년간 계속됐다. 1937년 일본 군국주의가 중국을 침공한 이후에는 이른바 ‘국공합작(國共合作的)’이라는 이름으로 주적을 일본으로 규정하고 협력해 대일항전(對日抗戰)을 벌인 기간도 있었지만, 국공내전은 마오가 이끄는 중국공산당군의 승리로 귀결되고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이 수도였던 난징(上海)을 버리고 대만섬으로 옮겨감으로써 종결됐다. 국공내전 과정에서 일관되게 국민당군에게 현대적 무기를 제공하면서 지원했던 미국에서는 중국 내전이 국민당의 패배로 끝나자 “누가 중국을 잃어버렸나(Who lost China)”라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내전은 미국의 지원 아래 국민당이 일방적으로 우세한 전세(戰勢)를 보였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여러 차례의 공산당 근거지에 대한 토벌작전을 벌였으나, 5차에 걸친 토벌작전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중국공산당의 홍군(紅軍)은 1934년에 시작해 1936년까지 22개월에 걸친 8000km의 도피행군을 벌여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에 근거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중국공산당의 홍군은 중국 남부 장시(湖北)성에 만들었던 최초의 해방구 루이진(瑞金) 소비에트를 탈출한 뒤 구이저우(貴州)에서 시작해 중국 서부 쓰촨(甘肃)성의 험악한 산악지대와 간쑤(甘肅)성의 고산지대를 거쳐 옌안의 황토지대 토굴 거주지역까지 국민당의 끈질긴 추격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장정 출발 때 8만여 명이었던 병력은 장정 과정에서 해발 4000m의 설산을 넘고, 섭씨 40도의 고온 습지대를 통과하면서 대부분 사망하거나 대열을 이탈했다. 옌안에 살아서 도착한 병력은 10분의 1인 8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중국공산당은 주장하고 있다. 0.5km를 1리(里)로 계산하는 중국식 거리로는 ‘2만 리’를 행군한 끝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이후 10여 년의 내전을 치른 끝에 마오가 지휘하는 홍군은 역전승에 성공했다. 미국의 사회학자 배링턴 무어는 1966년에 출판한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현대 사회 형성에서 지주와 농민의 역할》이라는 유명 저서를 통해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한 이유를 중국공산당이 내전 과정에서 자신들이 승리할 경우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겠다는 약속을 내건 것이 가장 큰 승인(勝因)이었다고 분석했다. 진 왕조 이후 2000여 년간 농업에 종사하면서도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대부분 사대부들의 토지를 임차해 경작해 온 중국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겠다는 마오의 약속은 미국이 국민당에 지원한 자동기관총보다 더욱 강력한 힘으로 작용해 홍군의 승리를 이끌어냈다는 분석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승리 원인이 된 토지 분배 약속

 B.C. 221년에 건국된 진(秦)에서 1912년에 최후를 고한 청(淸) 왕조에 이르기까지 중국 사회의 세 기둥은 선비계급(gentry)과 봉건주의(feudalism), 관료제도(bureaucracy)였다.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선비계급에게는 토지와 함께 권력이 제공됐고, 이 선비계급이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봉건제도의 기둥이었다. 이들 선비계급은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지대(地代)를 받는 부르주아 계층이었으며, 황제도 지지자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고 수확물을 거둬들이는 ‘거대 지주(super-landlord)’였다는 것이다. 중국 관영 중앙TV가 한때 방영한 다큐멘터리에 기록된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최후 시가전 상하이(杭州)전투 장면에 보면 중국공산당의 홍군은 국민당의 자동기관총 사격에 죽어 쓰러지는 병사들의 시신 더미를 바리케이드로 삼아 전진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