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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학 한국소비자보호원장
소비 환경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변하고 다양해지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에서 소비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정보 통신 혁명이 시장의 범위를 끝없이 확대하는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소비 시장의 세계화 추세 역시 신종 상품과 서비스를 쏟아내면서 새로운 소비자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새로운 문제란 무엇인가?
전자 상거래 분야의 민원이 폭증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1999년 3백 건에 불과하던 이 분야 소비자 불만이 2000년대 들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소비자 상담 건이 2001년 5천건에서 지난해 2만건으로 급증했는데, 같은 기간 온라인 거래(B2C)가 2조6천억원에서 6조원 이상 늘어난 데 따른 필연적 결과다. 인터넷 쇼핑몰이 3천5백개에 육박한다. 문제는 법과 제도가 이런 환경 변화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이버 거래가 소비자 위험 요소로 둔갑한 좋은 예가 미배송·대금 사취 행위가 사회 문제로 비화했던 하프프라자(반값 할인점)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정부가 에스크로(제3 기관에 결제 대금을 일시 예치하는 매매 보호 제도) 같은 안전 장치 도입 등을 골자로 한 전자상거래 소비자보호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게 만든 기폭제가 되었다. 과학 기술 발달로 인한 제품 과학화 추세도 위험 요소가 되었다. 유전자 변형(GMO) 식품이 좋은 예다.
소비자 정책이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는 법제와 행정 인프라를 체계화해 리콜 제도 활성화와 각종 안전 기준을 선진화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기업도 적극적인 소비자보호가 최선의 방어전략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소비자도 소비 행위의 의사 결정 주체로서 역량을 갖추어야 소비자 주권을 확보할 수 있다.
소비자보호법 개정 시도도 그 일환인가? 법 명칭에서 ‘보호’자를 빼던데.
현재 공청회를 통해 의견 수렴 중인데 재정경제부가 올 정기국회에 개정안을 낼 계획이다. 소비자보호법에서 ‘소비자 권익 증진에 관한 기본법’으로 법 이름을 바꾼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의 명칭도 ‘한국소비자원’으로 변경한다. 지금까지 소비자 정책은 규제로 일관하며 소비자를 상대적 약자로 인식하고 피해 구제 같은 사후적이고 소극적인 보호에 머물러 왔다. 이번에 단체소송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소비자 권익을 침해당했거나 그럴 우려가 있을 때 소비자단체가 이를 적극 해결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소보원도 역할 변화가 불가피한 것 아닌가?
사전 예방에 역점을 둘 것이다. 결함 상품으로부터 어떻게 소비자의 생명과 신체상의 위해를 막느냐 하는 안전 확보 정책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또 소비자의 경제적 손실을 예방하는 이른바 거래 적정화 정책도 날로 부각되고 있다. 사업자가 부당 표시와 허위·과장 광고, 부당 약관 등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사전 예방을 위해 노력해도 소비자 불만은 제기될 수밖에 없다. 피해 구제 처리에 크게 달라지는 점은 없겠지만 민원 자체를 줄이는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어떻게 민원을 줄일 작정인가?
연간 43만건의 민원이 발생한다. 이것을 처리하는 데 많은 인력과 예산을 쓰고 있는데, 소비자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민원 발생 건수가 절반으로 줄어들리라 확신한다. 민원 발생 건수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 소비자 교육을 강화하고 있으며, 차제에 교육센터 발족을 계획하고 있다. 소보원이 민원 처리에 인력을 덜 쓰게 되면 진짜 해야 할 일인 소비자 정책 개발과 대안 제시에 더 역량을 집중할 수 있다.
올해 6대 핵심 과제를 선정했던데.
지난 2년 동안 소비자보호 법령 및 제도 정비와 지방 소비자 보호 활성화 작업을 추진해왔다. 올해는 소비자 안전 확보 체계 구축·교육을 통한 소비자 자주 역량 강화·부당거래 심층 조사 등에 역점을 두었다. 이미 소비자안전센터를 설치하고 분야별 상시 감시 시스템을 구축해 경보를 발동하고 있다. 특히 식탁(먹거리) 안전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인터넷 방송 시스템 구축은 교육을 통한 자주 역량 강화의 일환이다. 소비자의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는 부당거래 심층 조사 건은 특히 전문적이고 경쟁 제한적 시장 구조로 말미암아 소비자 피해 접수가 빈발하는 금융·보험·의료 서비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비자의 상품 선택을 돕기 위해 냉장고·전자레인지·러닝머신·초고속 인터넷망 등 소비자 선호 품목을 비교 테스트하기도 했다.
특히 먹거리 안전이 확보되지 못하고 있다는 소비자 불만이 비등하다.
식탁 안전을 꾀하려는 시도의 하나로 소·돼지·닭 같은 육류의 항생제·합성항균제·농약·중금속 함유 여부 조사에 막 착수했다. 제대로 조사하기 위해 국립수의과학검역원과 국립농산품품질관리소 같은 외부 전문 연구기관과 협약을 맺어 공동 추진하고 있다. 축산물(도축장)과 냉동식품, 어육가공품, 빙과류와 집단 급식 업소 등에 대해 햇썹(HACCP·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 제도를 실시하고 있는데, 이 제도를 확대·의무화하는 것도 먹거리 안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비교 정보에 그치지 않고 소보원이 상품별 품질 리포트를 제공하는 것이 소비자 만족도를 높이는 데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좋은 아이디어다. 2002년 유럽 방문 때 독일 <테스트>, 영국 <위치(Which)>, 프랑스 <6천만의 소비자> 같은 소비자 정보지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놀랐다. 우선 시범적으로 지난해 종신보험과 공동묘역 이용료, 최근에는 휴대전화와 김치 냉장고 비교 조사를 시도했다. 마음 같아서는 순위도 내놓고 싶었는데 그게 참 어렵더라. 더더욱 품질 조사는 대단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하면 그냥 소송으로 번진다. 부끄럽지만 아직은 소보원의 시험검사소 수준이 기업에 비해 차이가 있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갑자기 기술 수준이 크게 나아질 수 없으니까 장기 과제로 돌리는 것이다.
최원장은 관료로서 잔뼈가 굵었다. 국무총리실에서 20여 년간 종합 조정 업무를 한 덕분인지 거의 모든 부처에 걸리는 소보원 업무가 낯설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는 8월 말 34년 공직과 소보원장이라는 공적 부담을 털고 비로소 자유인이 된다는 최원장은 지난 3년 동안 일에 푹 빠져 지냈다. 국무조정실에서의 26년 경험을 기록으로 남길 계획도 갖고 있다. 대통령 중심 체제에서 총리의 역할과 정책 결정 과정에서 총리 행태가 어떤 영향을 주는지 책을 쓸 생각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