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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 아프리카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이처럼 나들이가 길어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안씨는 외무부 소속이었다. 유엔 가입을 앞두고 한국에 호의적인 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파견한 의료 봉사단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동료들이 하나 둘 고국으로 돌아가는데도, 그는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묶여 있었던 것 같다”라고 안씨는 말했다.
안씨는, 그곳에서는 의사의 위상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의사가 돈과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병원 대부분이 국립이고, 의사는 준공무원이다. 치료비 부담이 없어서인지 주민들은 감기만 걸려도 엄마 품을 찾듯이 병원을 찾는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했던 안씨의 경우 역할이 더욱 컸다. 내과가 전문이었지만, 아이를 낳고, 나이를 헤아려주고, 사망 진단서를 떼어주는 일까지 도맡았다. 돈은 많이 벌지만 일개 기능인으로 전락하는 한국의 의사와 달리 사회의 큰 어른 역할을 톡톡히 했던 셈이다. 그 덕에 안씨는 90년대 초반 부족의 명예 추장으로 추대되었고, 마을의 씨족 재판에 참가해 왔다(씨족 재판은 정부도 역할을 인정하는 실질적인 사법 절차다). 세월 가는 줄 모르고 검은 대륙에서 땀을 흘린 까닭도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안씨는 고국에 돌아오면 그곳에서의 경험을 책으로 펴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