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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비닐 판부터 시작해 앨범 3천장 소장 수십 년 마니아 경험 묶어 ‘음반 대향연’ 펼쳐
그 페이지에서 한 장을 더 넘기면 컬러판‘명반 갤러리’가 열린다. 불멸의 명반이라 평가할 만한 음반 재킷 1백16장의 파노라마를 지나 본문에 접어들면, 1천5백51쪽에 2백63장을 소개하는 ‘음반의 대향연’이 펼쳐진다. 바로크에서 현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한 세대가 지나서도 살아 남은, 주로 60년대 이전에 녹음된 명반들이다.
<이 한 장의 명반>(현암사). 88년부터 94년까지 전3권이 출간되면서 ‘고전 음악 음반 입문서로 더 이상은 없다’는 평을 들은 이 책이 최근 증보판이라는 새 옷을 입고 한 권으로 묶여 나왔다. “사전적인 기능과 실용성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며 아울러 음악사까지 대강 부감(俯瞰)하여 명곡·명반을 한눈에 살필 수 있도록 새로 다듬고 고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지은이는 개정 증보판 머리말에서 밝혔다.
지은이 안동림 교수(65)는 자기가 고른 명반 하나하나에 독자에게 전해야 한다고 판단한 모든 정보를 짤막하지만 소상하게 소개했다. 제목·연주·지휘·녹음 시기·음반사(社) 같은 기초 정보에 이어, 음반에 얽힌 갖가지 사연이 짧으면 2쪽, 길면 10쪽 분량으로 명쾌하게 전개되어 있다. 일반인들이 좀처럼 알 수 없는 음반과 음악에 얽힌 갖가지 내용들을 간추려 놓았다. 그가 <이 한 장의 명반>에 소개한 희귀본을 모두 소장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안교수는 음악 전문가나 비평가라 불리면 몸서리를 친다. 단지 음악 애호가라고 주장한다. 전문가가 마땅히 가져야 할 부담이 싫고, 분석하기보다는 그저 편하고 자유롭게 즐기며 듣고 싶다는 것이다. 아마추어 애호가가 펴낸 책이 말 그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입문서가 되었던 까닭은, 지은이의 말대로, 그가 수십 년 동안 ‘죽음에 이르는 병’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본 손해 답습하지 말라는 것이 책 지은 뜻”
안교수는 청소년기였던 일제 시대부터 음악에 빠져들었다. 유성기를 만지지도 못하게 했던 아버지 몰래 그가 처음 접한 음악은 피아노나 성악곡 소품이었다. 모차르트의 <자장가>와 러시아 최초의 베이스 가수 샬리아핀이 부른 <볼가강의 뱃노래>를 그는 잊지 못한다. “고독했기 때문에 음악에 빠져들었다. 음악 듣기는 고독을 극복하는 과정이자 방법이었다”라고 안교수는 말했다.
‘결과물에 대해서만 평가하라’며 사적인 이야기를 좀처럼 꺼내지 않는 안교수가 단편적으로나마 털어놓은 조각들을 모아보면, 음악은 그에게 애틋한 반려자였다. 평양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혼자 남하한 그는 역시 고독 속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음악을 벗하며 외로움을 잊었다. 지주라는 이유로 북에서 아버지가 총살당하는 큰 아픔을 겪은 그는, 한국전쟁에 대해 큰 피해 의식을 가졌었노라고 어렵게 털어놓았다. 올 여름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전쟁에 대한 ‘생래적인 피해 의식’ 때문에 평생 졸업생 앨범 사진 한 번 찍지 않았고, 문패조차 걸지 않고 살아온 그에게 음악은 더할 나위 없는 위안처였다.
전쟁의 살풍경이 남아 있던 50~60년대, 그는 음악 다방을 찾았다. 서울 명동의 돌체와 무교동의 르네상스가 그의 고독을 어루만져 주는 공간이었다. 그가 소유한 첫 음반은 60년대 일본 잡지에 부록으로 끼여 있던 비닐 판이었다. 일제 샤프 모노 라디오에 플라스틱 턴테이블을 연결해 아껴 들은 것이 음반 수집의 시작이었다. 이후 미군 부대에서 음반이 흘러나온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그는 대학 강의도 제쳐두고 레코드 가게로 달려갔다. 비슷한 증세의 ‘환자’들과 함께 자장면을 먹으며 밤늦도록 음반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그 시간에, 주요 정보가 오가고 서로 간에 교육이 이루어졌다.
“내용물도 모른 채 각자 한 상자씩 들고 뜯었다. 다른 사람 상자에서 명반이 나오면 배가 아파서 거의 죽다시피 했다.” 음반 수집에 얽힌 그의 경험담은 끝이 없다. 용돈이 남아날 턱이 없었다. 집 몇 채를 살 만한 돈을 쏟아부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그렇게 나누어 주고도 CD를 포함해 음반을 3천장이나 소장하고 있는 안교수는 ‘음악의 골동품화’에 단호히 반대한다. 그의 집에는 요란한 스피커도, 고급스러운 음반장도 없다. 탄노이 췌비어트(스피커), 마란츠 세븐(프리 앰프), 2A3 (진공관 앰프), 린 손데(턴테이블), 메리디안(CDP) 등 평균 15년이 넘어 ‘한물 간’기기가 전부이고, 음반도 그만이 아는 분류법에 의해 낡은 장과 다락에 어지럽게 쌓여 있다. 청주대 연구실에는 제자가 갖다준 자그마한 카스테레오만 있을 뿐이다. 오디오 마니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음악을 듣고자 하는 이가 기기에 빠져서는 목적과 수단이 뒤죽박죽된다는 지론을 그는 가지고 있다.
“<이 한 장의 명반>을 들고 레코드 가게에 가서 ‘모두 구해 주시오’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슬펐다. 이 책의 의미는 이제 시작하는 사람들이 내가 본 손해를 똑같이 보지 말라는 것일 뿐, 무조건 따라오라는 것은 아니다.” 안교수는 음악을 받아들이는 최고의 명기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역설한다. 그는 또 음악을 배우기보다 라디오를 통해 먼저 익숙해지고, 먼저 자기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들으라고 권유한다.
73년 <장자>를 번역해 지금도 대학 교재로 읽히게 하고, 78년에는 <벽암록(碧巖錄)>을 공부 삼아 번역하기도 했던 안교수는, <이 한 장의 명반>을 쓰고 또 새로 다듬으면서 문장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였다. 재판을 펴내면서도 그는 초판을 새빨갛게 고치는 완벽주의를 고집했다. 같은 단어가 한 쪽에 2개 나오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철저한 그의 완벽주의는 건강을 해칠 지경에 이르렀다.
57년 <신태양>을 통해 등단한 뒤 70년대 초까지 소설을 썼던 그는, 오는 8월 정년 퇴임을 한 뒤에는 장편 소설 집필에 돌입한다. 그리고 <이 한 장의 명반>을 이을 음악 입문서를 두어 권 계획하고 있다.
“늙든 젊든 지적 호기심이 없으면 송장이나 다름없다. 세상에 재미나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지루할 틈이 어디 있는가. 호기심을 가질 대상이 정말 없으면, 지나가는 여자 다리라도 비교해서 보라.” 컴퓨터 게임에 6년째 푹 빠져 있는 그가 대학 제자들에게, 그리고 음반(음악)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드는 후학들에게 항상 들려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