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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서사시 <트로이>는 지중해의 푸른 물결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연출자는 <사선에서> <에어포스 원> 등을 만든 볼프강 페터슨. 꽃미남 브래드 피트의 변신에도 기대가 쏠린다. 무엇보다 <트로이>는 서양 문화의 원류인 그리스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트로이 전쟁이 실재했는지 아직 속시원히 밝혀진 바는 없다. 19세기 후반 하인리히 슐리만은 트로이 유적으로 추정되는 지하 도시를 발굴해 논쟁에 불을 댕겼다. 1930년대에는 미국 역사학자가 그 가운데 기원전 1250년 것으로 추정되는 지층이 트로이 유적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곳에 묻힌 지하 유적의 풍모가 영화로웠던 트로이의 것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보통 사람에게 익숙한 것은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가 그리는 트로이 전쟁의 전말이다. 호머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은 분쟁의 신 에리스의 음모 때문에 벌어졌다.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분쟁의 신 에리스는 분쟁을 일으킬 요량으로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황금 사과를 주겠노라고 제안한다.

헤라·아프로디테·아테나가 사과를 놓고 서로 다투다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판단을 맡긴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고 아프로디테는 그 대가로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파리스와 맺어준다.

신화적 요소 쳐내고 영웅들 캐릭터 부각

하지만 헬레네는 유부녀이다. 아내를 빼앗긴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과 함께 트로이 원정 길에 나선다. 10년을 끈 트로이 전쟁은, 유명한 트로이 목마를 성안에 들여놓으면서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이 난다.

영화 <트로이>는 <일리아드>의 얼개를 바탕으로 하되, 신화적인 대목을 대부분 쳐냈다. 파리스와 헬레네의 금지된 사랑 때문에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만든 것이다. 이채로운 것은 그리스 연합군의 전설적인 무사 아킬레스(브래드 피트)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다.

영화에서 아킬레스는 순결한 전사의 상징이다. 개인적인 야욕에서 전쟁을 일으킨 왕 아가멤논과 달리 아킬레스는 귀신 같은 전투 능력과 지략을 갖춘 전신(戰神)이면서도 전쟁의 정치학에는 넌덜머리를 내는 인물이다. 그는 무고한 병사들이 피를 흘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효율적인 전투에 골몰하고, 가능하면 혼자 맞장을 떠 상황을 해결하곤 한다. 그가 없이 이긴 전쟁이 없기에, 자신을 내놓고 무시하는 아킬레스를 아가멤논도 어쩌지 못한다.

아킬레스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적국 트로이의 장수를 존경하고, 위엄 있는 트로이 왕을 경배한다. 그는 트로이 왕자 헥토르의 목을 벤 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먼저 가서 기다리게, 형제여”라고 속삭인다. 아킬레스는 트로이 입성에 성공한 날 밤, 자신의 유일한 약점인 아킬레스건에 화살을 맞고 쓰러진다.

신화적인 설정을 빼버린 채 개연성을 갖추기는 쉽지 않았던 듯 초반부는 감정 이입이 쉽지 않다. 하지만 그 허술한 틈새는 곧 매력적인 영웅들의 캐릭터로 메워진다. 브래드 피트는 ‘철학하는 무사’ 아킬레스의 성격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 트로이 왕으로 등장하는 피터 오툴은 <아라비아의 로렌스> 못지 않은 카리스마를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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