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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주의와 결탁한 매체들은 문화 생산자가 어떤 형태의 문화적 지식을 제시했는가 아무 관심도 없다. 언제나 센세이셔널리즘만 쫓아다닌다.”

지구상 어느 나라 텔레비전들이 우리나라 텔레비전처럼 허구한 날 10대들의 춤과 아우성을 보여줄까? 또 어떤 나라 일간지들이 대중 연예 정보지도 아니면서 그렇게 대중 스타들의 별의별 일상사들을 총천연색 사진으로 대서 특필하며 법석을 떨까? 나라 안에 중요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어도 심층 보도 한번 하지 않는 텔레비전들이 틀기만 하면 한 달 단위로 바뀌는 열 몇살짜리 스타들의 뒤를 쫓아다닌다. 내가 나이가 든 것일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불만은 나 하나만의 것은 아닌 것 같다.

나에게 비교할 만한 외국의 경우가 프랑스밖에 없어서 프랑스의 예를 드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유학 기간에 말을 배우는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꽤 열심히 보았었다. 그리고 제법 텔레비전을 즐길 수 있었다. 볼 만한 프로그램이 제법 많았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사회 분석 프로그램과 교양 프로그램이 대부분이었다. 이따금 공들여 만든 문화 프로그램은 정말 질투가 날 정도로 세련되고 훌륭했다.

문제는 물론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시청률에 압박을 받으니까 방송에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10대들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 배분 문제를 놓고 볼 때 아무래도 좀 지나치다는 인상을 버리기 힘들다. 그리고 정말 그러한 방송들이 진정한 10대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대단히 의문스럽다. 이러한 방송 편성이 주는 가장 심각한 폐해는 프로그램 대부분이 상업주의적 이익을 따라서만 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1회용 반창고’가 넘쳐나는 신문과 방송

서태지와아이들의 경우만 해도 일정한 예술적 역량과 사회에 대한 메시지들이 읽혔다. 그러나 최근의 10대 그룹들은 철저하게 소비적이다. 패션이나 춤동작도 대단히 장식적이고 퇴폐적이거나 유아적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아티스트 자신보다 다른 요인들에 의해 생겨나는 것처럼 보인다. 충분히 성숙한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몇 달 단위로 스타들이 탄생하고 스러진다. 그리고 현장에는 거품만 남아 있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말했던 것일까? 그 열광은 삶의 어떤 부분에 어떤 형태로 유형화해 머무르는 것일까? ‘Gone with the wind’.

상업주의와 결탁한 매체들은 어떤 문화 상품 생산자가 어떤 형태의 문화적 에피스테메(특정한 시대·사회의 학문적 지식의 총체)를 제시했는가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언제나 센세이셔널리즘만 쫓아다닌다. 어떤 여성 시인이 누드 사진을 게재했다고 해서, 그것이 문학적으로 유의미한가, 그것이 그녀의 시 작품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와 아무 상관 없이 뉴스를 탄다. 문제는 그것이 시인 자신에게조차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 역시 대중 스타들처럼 1회용 반창고로 쓰이고 버려질 수 있다.

텔레비전과 신문을 당장 고급 문화 정보 매체로 바꾸자는 말이 아니다.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 사이의 경계가 지워지는 것이 현대의 문화적 추세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경계 지우기의 적극적인 의미는 대중이 문화적으로 충분히 훈련되어 자기에게 의미 있는 문화 코드를 선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에서만 획득된다. 대중이 문화적으로 충분히 성숙해 있지 않을 경우, 이 경계 지우기는 아주 폭력적인 양상으로 문화 전반을 휩쓴다. 대중문화론자들의 기대와 달리 민주적 문화 소비의 대전제가 되어야 할 ‘다양성’ 자체가 위협당하고, 대중문화주의는 문화민주주의가 되기는커녕 일종의 새로운 문화적 나치즘, 즉 새로운 형태의 음산한 문화전체주의의 징후마저 보인다. 최근에 우리나라의 베스트 셀러 현상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이러한 ‘베스트 셀러’들이 한결같이 현실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중의 비판 기능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비판이 가해져야 할 대상을 대체시켜 버리는 매우 위험한 대체 효과마저 낳는다. 문화는 저항력을 잃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저항력은 상업주의에 투항한 문화에 의해서는 절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최종적 책임은 물론 문화 상품 생산자들이 져야 한다.

그러나 매체의 영향력이 이처럼 막강한 시대에 그들에게 무턱대고 물만 먹고 살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매체가 한귀퉁이에 순수 문화의 저항력을 보장할 수 있는 일정한 지분을 배분해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전망이 불투명한 나라에 그나마 문화마저 저항력을 잃으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모두들 황금송아지 앞에 가서 노예 노릇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다면 상관 없겠지만, 불행히도 또는 다행히도 인간의 의식은 죽어도 물질을 건너가려고 한다. 그것이 문제이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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