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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5형제가 한국 지킨다’[제514호]는 전자·정보통신·자동차 부문의 수출 현황을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기사가 너무 국내 기업의 상품 소개에 치우쳐 있어,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외국의 전자·자동차 회사들과 비교해, 한국 상품의 수준·시장 점유율·국제적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수치로 보여주었더라면 더 풍성한 기사가 되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아쉬웠던 것은 TFT-LCD(박막 트랜지스터 액정 표시 장치)·CDMA(코드 분할 다중 접속 방식) 같은 전문 용어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이주열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1가)

반갑고 놀라운 ‘잠의 비밀’

늘 <시사저널>에 과학 기사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왔던 독자이다. 그런데 제514호에서 ‘꿀같이 달콤한 잠의 비밀’을 만나 반가웠다. 잠이 우리 일생에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니 정말 놀랍다. 따지고 보면 잠은 우리 일생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잠의 비밀, 잠의 과학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수면 장애로 인한 불편을 고스란히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잠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뒤따라, 국민의 잠자리가 편안해지고 건강이 좀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지현 (강원도 원주시 학성동)

환영 ‘인천 차이나타운 재건’

‘잊힌 거리 차이나타운’[제514호]을 읽고, 우리가 중국과 밀접한 문화를 갖고 있으면서도 중국 문화를 너무 외면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만 하더라도 요코하마에 차이나타운을 건설해 관광 명소로 키웠다.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생긴 것은 1884년이다. 현실은 어떠한가.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거리 곳곳이 파헤쳐지고, 한국인들의 편견과 차별 때문에 화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다. 이제 차이나타운은 그야말로 추억의 거리일 뿐이다. 다행히 인천 중구청이 차이나타운을 다시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니 반갑다. 우리는 옛것을 너무 쉽게 무너뜨리고 갈아엎는다. 이 참에 그런 문화 풍토까지 없앴으면 한다.

이헌열 (서울시 동작구 상도3동)

‘예수는 정녕 부활했는가’를 읽고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국민 수보다 종교인 수가 더 많은 기이한 나라이다. 종교도 세계적인 카톨릭 기독교 불교는 물론 민족 종교까지 백화만발하고 있다. 그야말로 종교 박물관인 셈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는 아직도 어두운 그늘이 널려 있다. 왜일까. 혹시 종교가 현실을 외면한 채, 천국과 극락 같은 내세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사상누각과도 같은 허망한 것이다. 오히려 종교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오늘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종교인들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에 관심을 가지고, 또 그곳을 ‘구원’하는 데 나서야 한다. 뿐만 아니라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는 민족 공동체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도 종교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반세기에 걸친 민족 분단의 원죄를 푸는 작업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지금 이 시대 한국의 종교에게 맡겨진 소명이다. 그런 가운데 나온 영국의 성공회 대주교 조지 케리 켄터베리의 ‘밀레니엄 메시지:예수 2000년’의 내용은 신선했으며, 그것을 ‘예수는 정녕 부활했는가’[제514호]로 다룬 <시사저널> 역시 신선했다.

정중규 (부산시 수영구 광안4동)

‘예수는 정녕 부활했는가’를 읽으면서 한국의 목회자에게 일대 반성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이며,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교회와 교인들은 어떠한가. 나만 옳고 남은 다 이단이며 사탄이라고 단호히 배격한다. 실례로 여주 등지에서 단군의 동상 목을 자르고, 절에 들어가 불상을 깨뜨리고, 국립공원 바위에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리고, 민속의 하나인 장승을 미신 숭배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한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타 종교와 더불어 공존하기를 바란다.

채규정 (충남 서천군 서천읍 군사리)

‘엉터리 외국어’ 너무 많다

여름 방학을 맞아 한국을 방문했다. 그 전에도 영어로 된 상표와 간판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음반 가게 신세대 가수(그룹)들의 이름 대부분이 외국어였고, 노래 제목 가사에도 영어가 난무했다. 국제 홍보를 위해서라면 한글보다 분명 영어가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들이 한국인들을 향한 홍보물이라는 점이다. 어느 방송 인터뷰를 보니 ‘놀랐다’를 계속 ‘쇼킹하다’로 말했다. 외국어를 하나라도 더 섞어 말해야만 유식해 보이는 걸까. 문제는 한국에서 쓰는 영어 대부분이 바르게 쓰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같은 점은 특히 영화 제목에서 두드러진다. 이번에 개봉되는 <아이 오브 비홀더>는 원 제목이 이다. 이것은 분명 국적 없는 ‘콩글리쉬’이다. ‘the’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영어에서는 정관사가 있고 없고에 따라 그 뜻이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이같은 영화 제목은 수없이 많다. 서울 시내 거리를 걷다 보니 곳곳에서 영어 교육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서점의 영어 회화 관련 서적 코너(한글 대체어를 찾아내려고 해도 없는 것 같다)는 연일 북적거렸고, 영어 회화를 배우는 학원은 수강생들로 빽빽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우리말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진정한 세계화를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훌륭한 문화를 지니고도 관리 소홀과 무지 때문에 잊혀져 가는 것이 아쉽다. ‘나를 알아야 남을 안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일이 21세기에 한국이 재도약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한지선 (미국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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