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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회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되돌아보거나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제395호].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추모 움직임은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최근처럼 노골적이고 체계적으로 벌어지는 것은 문민 정부의 실정에 따른 상대적인 반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박대통령의 모든 면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무리지만, 시대 상황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통치했다고 생각한다. 낙후한 경제를 일으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라고 간파한 그는 그 시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지금의 문민 정부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커녕 토끼 잡을 도구마저 써보지 못하고 끝을 바라보고 있다.

권태경 (경북 안동시 운안동)

지금 정치 상황은 최악이어서, 국민이 대통령을 불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박대통령이라면 이렇지 않을 텐데…’ 하는 묘한 향수 심리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특정 정치 세력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박대통령 향수를 조장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난 어려운 시절에는 카리스마적인 통치자가 어쩔 수 없이 등장했다. 지금은 그 때와 다르다. 유신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이들이 복제하고 싶은 인물로 그를 뽑는 데에 어처구니가 없다. 만일 지금 박대통령과 같은 인물이 집권하고 있다면 대학생 대부분은 학업을 중단하고 시위로 날을 지샐 것이다. 과거는 항상 미화되고 과장되기 쉬운 것이다. 현실 문제의 해결책은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

이정환 (충남 서천군 비인면 장포리)

과소비 원인 진단에 납득 안가

<산케이 신문> 서울 특파원 구로다 가쓰히로 씨의 칼럼 ‘과소비에 대한 한국인들의 오해’[제395호]을 읽고, 경제 침체로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는 시점에서 수입품 관련 문제를 다루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 점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백만원을 쓰는 것보다 천 명이 각각 만원씩 쓰는 것이 훨씬 과소비라는 그의 논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른바 못가진 자들로 하여금 과소비하게 만든 것이 다름 아닌 부유층의 과소비 행태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 아닐까. 우리 사회의 과소비 문제는 부유층의 호화롭고 사치한 소비 습성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과소비를 억제하려면 여전히 가진자들의 절제와 검소의 미덕이 절실하다.

김현령 (대구시 동구 신암3동)

청량제 같았던 퇴계와 하회

내 고향을 다룬 것이라서 그런지, 경북 안동 관련 기사는 언제 읽어도 정겹고 새롭게 느껴진다. 이번 여행 기사[제394호]에서 몇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영남학파 유림 씨족을 열거하는데 정작 명문 거족들인 전주 류·광산 김·고성 이·풍산 김·영천 이·예안 이·한산 이·청주 정 씨 등은 누락되었다. ‘인다안동(人多安東)’의 명성에 대해 좀더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취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회 마을을 소개하는 데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소개가 빠져 아쉬웠다. 몇 가지 난해하거나 추상적인 표현도 안동을 알리는 데 적절치 못했다고 생각된다.

권정달 (국회의원)

작금의 정치·경제 상황에 식상했던 차에 도산서원과 하회 마을 여행 기사는 한 잔의 생명수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렵고 힘든 사회 생활 속에서 현실 도피의 안식처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심정이다. 그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하회의 산천과 퇴계의 삶은 나 같은 보통 사람에게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청량제 같았다. 인간의 삶은 자연을 떠날 수 없고 결국 그 속에 안겨 있다는 말을 되씹고 싶다. 역사 속 인물과 그들이 남긴 유적, 문화 유산을 다룬 기사를 계속 실어주기 바란다.

허 현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괴안동)

과학 기술 외면하지 않았으면

<시사저널>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애독자로서 제언한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성장한 것은 소수 엘리트 경제 관료들이 주도한 계획 경제에 힘입은 것이지만, 이제는 과학 기술만이 살 길임을 모두가 다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한국 지성과 대중의 선도 역할을 자처하는 <시사저널>에 과학 부서나 담당자조차 없다는 것은, 말로만 ‘과학 기술 우선’을 남발하는 다른 기성 언론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시사저널>의 광고도 최신 기술을 뽐내는 공산품 광고가 대부분인데, 이것이 생활 과학 기술란인가 싶어 자세히 보게 될 정도다. 아무리 과학 전문 잡지가 아니더라도, 실생활과 밀접한 과학 기술을 외면하고 구태를 벗지 못하는 정치·사회에만 초점을 들이대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과학 기술 관련 지면을 고정적으로 운영한다면 더 많은 독자가 <시사저널>을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윤홍근 (경기도 시흥시 논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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