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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기의 전설’ 최배달·역도산 다룬 영화 잇따라 나와
먼저 선보일 <바람의 파이터>는 개봉을 앞 두고 상반된 내용의 만화와 책이 출간되어 논쟁을 부채질하고 있다. 최영의의 세 아들이 공동 집필한 평전 <디스 이즈 최배달>(찬우물 펴냄)과 새로 번역 출간된 일본 만화 <무적의 파이터>(학산문화사 펴냄)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이목을 끌고 있는 것이다.
최영의는 영화 <넘버 3>에서 불사파 건달 송강호로부터 ‘세계를 상대로 맞장을 뜨신 분’으로 추앙받았던 바로 그 인물이다(“전세계를 구름처럼 떠다니면서 맞짱을 뜨신 분이야. 그 양반은 황소 뿔도 여러 개 작살내셨다. 이런 식이다. 딱. 아..아..앞에 딱 서. 너 소냐? 나..나..나 최영의야! 그리고 뿔을 딱 잡어. 그리고 내..내리쳐. ×나게 내리치는 거야. ×나게. 소뿔이 부러질 때까지.”)
그의 표현대로 최영의는 황소 수십 마리를 맨 손으로 잡아 소뿔을 주먹으로 끊어냈고, 세계를 돌며 장르를 가리지 않고 싸움을 자청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스포츠 경기가 되어버린 가라데에 맞서 실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어떤 갈래의 무술이건 왕성하게 섭렵했다.
아들이 쓴 평전과 1970년대 일본 만화에서 가장 크게 엇갈리는 대목은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갖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일본 만화 <무적의 파이터>(원제 가라데 바보 일대)는 최영의가 일본에서 일본 청소년의 우상으로 떠오르던 시기인 1970년 초 잡지 <소년 매거진>에 연재되던 것을 묶어 번역한 만큼 그를 철저히 일본인으로 그렸다. 패전 후 일본에서 보기 드문 애국심을 가졌던 일본 청년으로 묘사될 뿐, 한국인으로서의 고뇌는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사측이 특히 문제 삼는 대목은 그가 가미카제 특공대로 출정한 친구들을 그리며 “어차피 한번 핀 꽃 질 것을 각오하며 아름답게 집시다. 조국을 위해”라고 말한다든가, 일본의 패망을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는 내용 등이다.
영화사측은 “최영의가 귀화하면서도 이름을 배달 민족의 후예라는 뜻에서 ‘오오아먀 마쓰다쓰’(대산배달)로 지었으며, 극진 가라데의 극진도 일본에는 없는 표현으로 극진하다는 한국식 표현에 따른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들 최광범씨 또한 불쾌한 기색이다. “일본에서 그 만화가 나왔을 때 아버님이 언짢아하셨으나 이미 게재된 만큼 가만히 계셨던 것일 뿐이다. 뒤늦게 이 만화를 번역 출판한 학산문화사가 무책임하다”라고 말한 것이다. 한편 번역 출판사인 학산문화사에 따르면, 글을 쓴 작가는 최영의를 직접 인터뷰하고, 그림을 그린 이도 가라데를 배우면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일본만큼 명성을 얻을 기회가 없었지만, 한국에서도 그에 매료되어 작품을 쓴 이들이 있다. 1975년 고우영 화백이 그의 일대기를 만화로 그렸고, 이어 방학기씨도 관심을 보였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는 바로 방학기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이 영화의 제작비는 총 60억원. 전액 한국 자본으로 만들어졌지만 일본에서 로케하고 현지 촬영진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었다. 현재 일본에는 2백만 달러에 선판매된 상태이다. 국내 개봉은 8월12일.
<바람의 파이터>가 끊임없이 무예를 연마해 경지에 오른 무인의 단련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면, 역도산을 다룬 <역도산>은 영웅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면모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천황 다음의 영웅’이라 불렸던 역도산. 일본에 그와 관련된 서적이 총 1백60종에 이른다는 사실이 그의 명성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그런 일본에서조차도 정작 대중 영화로 그를 다루는 것은 녹록한 과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본측 공동 프로듀서는 역도산에 관한 설이 분분하고 정면으로 승부하기가 어려운 난공불락의 소재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한 예로 야쿠자의 사주에 따른 것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1963년 요절한 그의 죽음을 놓고도 설이 분분하다.
영화의 총 제작비는 100억원. 시나리오는 영화 <파이란>을 통해 양아치의 삶을 밀도 있게 그려내었던 송해성 감독이 직접 썼다. 설경구가 몸무게를 20kg 이상 늘려 역도산의 풍모에 도전한다. 설경구는 “조선인을 비웃는 일본인을 미워하면서도 정작 조선인이 아닌 척 살았던 인물이다. 사석에서도 한국말을 하는 법이 없었고, 내면이 무지 복잡했던 인물이어서 끌린다”라고 그를 평가했고 ‘한 번뿐인 인생, 착한 척하지 마라’를 최고의 명어록으로 꼽았다. 1963년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그의 41주기 기일인 12월15일에 맞추어 개봉될 예정이다.
작품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최영의와 역도산의 실제 관계에도 관심이 쏠린다. 역도산은 1963년 요절했고, 최영의는 1994년 고희를 넘길 때까지 살았다. 하지만 패전 후 실의에 빠진 일본 국민에게 영웅 대접을 받으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호시절은 비슷하다. 관련 서적들을 비교해보면 두 인물의 애증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단 역도산과 최배달은 대결을 할 뻔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과정에 대한 설 또한 분분하다. 평전 <디스 이즈 최배달>에 따르면, ‘역도산이 치사한 방법으로 당대 최고의 유도 영웅 기무라를 거꾸러뜨린 후 그 링에서 바로 역도산에게 달려들려 했으나 (최영의와 기무라는 각별한 사이였다), 주변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후에도 설욕을 다짐했으나 그럴 가치가 없다고 여겨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나온다.
한편 역도산 평전 <반역의 레슬러 역도산>(고두현 지음)에 따르면, 둘을 두루 알고 있는 그 분야의 재일 교포 실력자들이 만류해 최영의의 도전이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두 가지 설을 종합할 때 최영의가 역도산에게 각별한 대결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는 역도산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둘 사이의 미묘한 갈등은 역도산의 제자인 김 일이 최영의에게 도전 의사를 밝히는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최영의와 역도산이 맞설 뻔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 경기 또한 재일 교포 실력자들이 말리는 바람에 실제 성사되지는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