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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환자가 꾸미는 ‘사이코 드라마’ 텔레비전 중계

“자신이 왜 사람들을 기피한다고 생각하세요?” “실수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결국 완벽주의 때문이죠.” “사람들 앞에서 크게 망신당한 경험이 있나요?” “네. (머뭇거리다가) 고등학교 때…, 수업 시간에 책을 읽으라고 지목되었는데 제대로 못했어요.” “그 상황으로 돌아가 보죠.”

지난 8월31일, 서울 강남에 있는 한 병원에 마련된 사이코 드라마 무대. 완벽주의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스스로를 진단한 이강섭씨(42)는 ‘이제 나의 틀을 깨고 싶다’며 무대에 올랐다. 실연은 3시간 동안 이루어졌고, 주인공(이강섭)도 연출자 김정일씨(정신과 전문의)도 땀에 흠뻑 젖었다. 오픈 드라마(공개극)로 진행된 이 날 무대는 방송을 위한 것이었다.

이 무대는 케이블 텔레비전의 의학 전문 채널인 ‘의료+건강26’이 신설한 <치료 심리극>(연출 김은지·매주 화요일 3회 방영/새벽 3시·오전 8시30분·오후 9시)을 통해 전파를 탔다.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극장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치료 심리극>은 사이코 드라마를 중계하는 최초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된 셈이다.

소규모 집단에서 성원 간의 신뢰를 기초로 하여 진행되는 사이코 드라마를 대중 앞에 공개하는 것은 모험에 가깝다. 병원측으로서는 참여자가 반발하거나 위축되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고, 제작팀도 내용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으므로 부담이 크다. 대본이 없는 즉흥극, 무대 소품도 변변치 않다. 연출팀은 속수무책으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어야 한다. 아무래도 일반 연극에 비해 긴장이 떨어질 테니, 시청자가 지루해 하지 않을까 하는 것도 걱정거리다. 처음 아이디어를 낸 김은지 프로듀서는, 부담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확고한 소신이 있었다. “몸의 건강 못지 않게 정신 건강도 중요하다. 마음에 병이 나면 사람들은 쉬쉬한다. 비정상이라고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다. 이런 통념을 깨고 싶었다.”

앞으로 <치료 심리극>은, 병원에서 진행되는 사이코 드라마뿐 아니라 사회단체나 대학이 마련하는 소시오 드라마(사회극)를 중계할 예정이다. 제작팀은 정신과 치료에 대한 사회 통념을 감안해 출연자의 신원이 드러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쓸 계획이다(첫 출연자 이강섭씨는 본인의 강력한 바람에 따라 모자이크 처리를 하지 않았다).

전파를 타기 전에도 사이코 드라마는 진작에 거리로 나섰다. 지난 3월 정신과 전문의와 연극인 들이, 대학로에 사이코 드라마 극장을 열었던 것이다. 용인정신병원 사이코 드라마팀(대표:김수동 정신과 전문의)이 주도해 매주 월요일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무대가 마련된다(9월13일부터 공연이 재개된다).

사이코 드라마는 ‘정신과의 외과 수술’

한국에 사이코 드라마 치료법이 활용된 것은 75년. 정신과 전문의 김유광씨가 국립서울정신병원에 처음 이 기법을 도입했다. 사이코 드라마가 알려진 것은 한국전쟁 때였다. 미국 의사들이 선보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치료법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75년이 처음이라고 김유광씨는 말했다.

이후 사이코 드라마는 고려대 출신 전문의를 중심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고대 의대의 특수성이 작용했다. 고대 의대에 연극반 활동이 활발해서 정신 분석과 연극이 결합되는 사이코 드라마가 활성화했던 것이다.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김수동(용인정신병원) 윤성철(대유병원) 김혜남(국립정신병원) 우경종(일산) 원경식(부산) 씨가 대표적인 고려대 출신 의사들이다.

정신과뿐 아니라 사회복지학과·심리학과·가정관리학과에서도 관심을 갖는 이가 부쩍 늘었다. 한양대 가정관리학과 이정숙 교수는 제자들과 함께 팀을 꾸려 활발히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다. 병원이나 사회단체가 마련한 사이코 드라마에는 상담 담당자의 발길도 잦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포착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리나, 문제 상황을 밀도 있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코 드라마가 정신과 치료 요법 가운데 하나로 창안된 것은 20년대다. 창안자는 루마니아 태생 유태계 의사 자콥 레비 모레노(1889∼1974). 그는 사이코 드라마·소시오 드라마·역할극(유아 대상) 등 현재 활용되는 심리극의 기반을 고루 다져 놓았다. 모레노는 상담보다는 비언어적인 표현 수단을 통해 감정을 표출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효과가 클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양한 기법을 개발했다. 사이코 드라마가 ‘정신과의 외과 수술’로 불리는 이유도 체험의 강렬함 때문이다.

출발은 소시오 드라마였다. 그는 전문 연극 배우와 함께하는 ‘즉흥성 극장’을 마련하고, 신문에 난 사건을 극화하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신문’으로 불리는 이 기법은 소시오 드라마의 초기 형태다. 모레노가 소시오 드라마에 먼저 관심을 가진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개인이란 집단 속의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개인의 사회적 역할이 확장될 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사이코 드라마의 폭넓은 치료 효과

사이코 드라마의 적용 범위는 넓다. 김유광씨는 보통 사람이 두려워하는 상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직장 생활을 두려워하는 사회 초년생이나 출산을 앞두고 불안에 떠는 임산부는, 입사 이후 모습이나 출산 후를 미리 체험하게 함으로써 두려움을 줄인다(미래 투사 기법).

용인정신병원 정신과 전문의 강상범씨도 폭넓은 치료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신경증은 물론이고 정신분열증 가운데서도 망상 회복기, 병식(자신의 병을 인정하는 것. 환자 대부분은 초기에 병을 부정한다)이 생기기 시작하는 단계의 환자에게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물론 효과가 없는 유형도 있다. 자아 기능이 약한 경우에는 겉보기에 극이 무리 없이 진행된다고 해도 내면에 영향을 끼치기 어렵다. 회복이 어려운 중증 환자나,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가 그런 예다. 이들은 우울감(우울증과 다른 일상적인 감정이다)을 느끼지 못하고,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책감이 없다. 반성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일수록 효과가 크다는 뜻이 된다. 자아 기능이 강하고 성찰 능력이 있는 사람은 기대할 만하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자의식이 강하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강상범씨는 지적한다. 그는 “경험이 풍부한 전문의만이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판단하고 극을 이끌 수 있다”라고 말한다.

사이코 드라마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전문가의 우려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으로 상처만 헤집고 수습하지 못하거나, 연출자가 과시욕에 이끌려 환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김유광씨는 “수술한 뒤 봉합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상처가 곪듯이 사이코 드라마도 정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한다. 기법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상처를 받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무대에 오르는 주인공은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면이 드러나지 않을까, 사람들에게 조롱받지 않을까 위축된다. 관객의 반응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주인공이 무거운 주제를 택하고 스스로 해결책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 관객도 덩달아 마음이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사이코 드라마 특유의 결속력이 작용하는 것이다. 심할 경우 관객은 주인공을 보며 무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 때문에 ‘나누기’ 과정이 한층 강조된다. 사이코 드라마는 크게 ‘워밍업 - 실연 - 나누기’로 진행되는데, 마무리 단계인 나누기는 실제 공연만큼 비중이 높다. 무대에서 내려온 주인공은 자신이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설사 박수를 받는다 해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불안해 하는 것이 주인공의 심리라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구체적인 공감과 지지하는 말이다. ‘나도 그런 상황에서 당신처럼 했을 것이다’ 따위 말은 의외로 효과가 크다. 강상범씨는 “전문가가 주인공이 되어도 발가벗겨지기는 마찬가지다. 환자가 들려주는 지지의 말에 감격하는 예도 흔하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연출자는 관객이 주인공에게 심문이나 비판을 하지 않도록 훈련해야 한다. ‘여기서는 누구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마음의 문을 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상범씨는 “주인공이 되어 보지 않고서 사이코 드라마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말한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의사도 인간이므로 심리적인 문제가 없을 수 없고, 경우에 따라서 의사 자신의 문제 때문에 극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이는 정신 분석 등 다른 치료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연극 무대를 통해 심리를 표출시키는 데 주력했던 모레노의 표어는 ‘더 건전한 사회를 위하여’였다. 사이코 드라마의 병원 밖 나들이가 늘어난 것은 건전한 사회를 향한 첫걸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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