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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로 나미에 내한 공연을 통해 본 일본 대중음악의 한국 진출

명불허전. 지난 5월13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일본 가수 아무로 나미에의 내한 콘서트 ‘So Crazy Tour 2004’는 일본 대중 음악(J-POP)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탁월한 가창력과 역동적인 춤, 세련된 무대 매너로 무장한 아무로 나미에는 ‘J-POP의 여신’이라는 칭호가 허명이 아님을 증명했다.

일본의 연예기획사 시스템이 낳은 최고의 아이돌 스타, 그러나 아무로는 결코 ‘무대 위의 바비 인형’이 아니었다. 밴드 멤버 4명, 백댄서 8명과 함께 무대에 오른 그녀는 총 21곡(메들리곡 포함 25곡)을 열창해 6천여 관객을 감동시켰다.

이번 콘서트는 지난 1월1일 시행된 일본 대중 문화 4차 개방 이후 가장 큰 사건으로 한·일 양국 언론의 관심을 모았다. 아무로의 이번 콘서트는 한국에서 일본 대중 음악이 어떤 위상을 갖는지 가늠하게 해주었다.

대중 음악 전면 개방 조처로 일본어 음반을 낼 수 있게 되면서 일본 가수들의 음반이 쏟아져 나왔다. 올 들어 글레이·엑스 재팬·라크 엔 시엘·스맵·드림스 컴 트루 등의 그룹과 우타다 히카루·아무로 나미에·마이 구라기 등이 국내에서 음반을 발매했다. 케이블TV 음악 방송과 위성 채널에서는 J-POP 특집 방송이 편성되어 개방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그러나 정작 시장의 반응은 썰렁했다. 현재 일본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우타다 히카루의 경우, 일본에서는 1집 앨범만으로 천만 장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지만 한국에서는 1·2·3집을 동시 발매했는데도 겨우 4만장을 판매하는 데 그쳤다.

국내 음반 시장이 침체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런 부진은 의외였다. 일본 대중 문화에 시장을 개방해 ‘문화 쇄국주의’의 빗장을 풀겠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몇몇 전문가들은 취약한 국내 음반 시장이 궤멸할 것이라는 비관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일본 대중 음악은 한국 대중 문화로 편입되지 못한 채 여전히 마니아 문화로 머물렀다.

일본에서 2천만장 이상 음반 판매고를 올린 슈퍼 스타로서 젊은 여성들의 따라 하기 열풍을 일으켜 ‘아무로 나미에 신드롬’을 일으켰지만 아무로 역시 국내의 차가운 반응에 직면했다. 콘서트를 앞두고 기자회견을 위해 4월7일 그녀가 방한했을 때 공항에는 10여 명의 팬만이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기획사의 적극적인 홍보와 국내 팬클럽의 결집으로 콘서트를 위해 5월12일 입국할 때는 환영 인파가 10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5천여 일본 팬이 나와 공항을 마비시킨 <겨울연가> 배용준의 방일과 비교할 때 아무로에 대한 팬덤 현상은 뜨겁지 못했다.
국내 경기 불황 탓에 티켓 판매율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3일 간의 공연 중에서 첫날인 5월13일에는 1만석 규모의 공연장을 절반 정도밖에 채우지 못했다. 그러나 기획사는 정공법을 택했다. 콘서트 제작에 20억원 정도를 들인 기획사는 일본 투어 콘서트에 썼던 세트와 스태프 50명을 그대로 끌어들였다.

아무로의 콘서트를 후원한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관계자는 이번 공연을 ‘희생 번트’라고 표현했다. 성공할 수 없는 공연이지만 이 공연 덕분에 일본 대중 가수의 한국 진출에 물꼬가 트인다는 것이다. 다행히 첫날 공연이 성공함으로써 둘째 날은 좌석의 80% 정도를 채울 수 있었다. 한국 가수 비와 함께 한 마지막 날 공연은 거의 빈자리 없이 치러져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무로의 성공은 일본 대중 음악의 한국 진출 가능성을 확인해 준 동시에 한국 대중 음악의 현재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콘서트장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아무로가 앙코르 곡으로 를 부르자 많은 관객들이 따라 불렀다. 아무로 나미에를 코슈푸레(옷과 머리 모양을 모방)하고 공연장을 찾은 고슬기씨(23)는 “춤만 열심히 추고 노래는 립싱크로 입만 뻥긋하는 한국 가수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카리스마를 느꼈다”라고 말했다.

아무로의 무대를 보고 가장 긴장한 사람들은 국내 연예기획자들이었다. 현장을 취재한 스포츠 조선의 송원섭 기자는 “여자 신인 가수를 키우고 있는 기획사 관계자들이 다들 한숨을 쉬었다. 아무로와 비교하면 자기가 키우는 신인의 경쟁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아무로의 한국 내 연예 활동을 대행하고 있는 리쿠드엔터테인먼트 곽승훈 대표는 “이번 공연이 국내 가요계의 베끼기 관행에 쐐기를 박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국내 가요계를 장악한 댄스그룹들은 대부분 일본 미소년 미소녀 그룹을 베낀 것이었다. 특히 지난해 국민 스타로 떠오른 이효리는 아무로를 앵무새처럼 따라 해 네티즌으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이번 공연에서 나타난 흥미로운 현상은 아무로에 대한 팬덤 현상이 일본과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마치 일본 중년 여성들이 <겨울연가>를 보고 한국의 중년 여성들과 똑같이 반응했듯이, 아무로의 공연을 보고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일본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능력과 섹시함을 겸비한 아무로의 팬은 주로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다. 이번 한국 공연에서도 여성 관객이 90%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아무로의 성공이 일본 가수들에게 한국 진출 붐을 일으킬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다. 정치와 경제의 복잡한 함수가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일 관계는 일본 대중 가수들의 한국 진출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외교와 대중 문화 개방을 연동시키는 것과 달리 일본 정부는 자국 대중 문화의 한국 진출을 적극 후원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본 대중 문화에 대한 시장 개방 조처가 발표되자 일본대사관은 공보문화원 산하에 일본음악정보센터를 설치하고 일본 대중 문화의 한국 진출을 도왔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대중 문화를 국가 이미지 제고와 수출 확대의 첨병으로 삼아 왔다. 1970년대 중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을 경제 착취의 원흉으로 지목하는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본은 ‘후쿠다주의’ 정책에 따라 문화 교류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이때 반일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이용된 것이 바로 드라마 <오싱>이다. 일본 정부는 일본국제교류기금(Japan Foundation)을 통해 전형적인 신파조 드라마인 <오싱>을 아시아에 전파했다.

일본 정부가 일본 대중 문화의 한국 진출을 적극 돕고 있지만 향후 판도를 결정짓는 것은 정치보다 경제이다. 일본 대중 음악의 한국 진출은 철저하게 개별 기획사의 경제적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경제 관점에서 일본 대중 가수들에게 한국은 그다지 매력적인 시장이 아니다. 한국 음반 시장은 일본의 8분의 1 정도인데, 그나마 MP3 파일 등의 문제로 시장이 극도로 침체해 있다. 더군다나 가요의 비율이 75% 이상으로 높고 외국 음반의 비중이 낮다. CD 가격이 일본보다 절반 이하인 것도 단점이다. 한국에서 판매되는 일본 가수의 음반이 일본으로 역수입될 우려도 있다는 것이다. 이번 아무로 콘서트에서도 일본 팬들이 값싼 한국 CD를 사갈까 봐 주최측은 공연장에서 음반을 판매하지 않았다.

저작권 문제도 걸림돌이다. 국내 음반계는 무료 MP3 파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국내 저작권법의 보호를 거의 못 받고 있는 일본 가수의 노래는 더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웬만한 일본 대중 음악 음반의 경우 인터넷에 앨범채로 파일이 올라와 있어 누구나 손쉽게 내려받을 수 있다.
일본 연예기획사 오시의 프로듀서 마사히코 오시자카 씨는 “경제 관점에서 당분간 일본 톱스타들이 한국 시장에 적극 진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본 국내 음반 시장도 침체해 불확실한 한국 진출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라고 말했다.

스타 시스템이 원활히 작동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일본 드라마가 개방되어 있지만 케이블TV에 제한되고, 그나마 시청률이 낮아 배용준이나 원 빈 같은 스타를 배출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예인이 주로 출연하는 쇼 프로그램은 개방되지 않아 상승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아무로 나미에가 무리해서 한국 콘서트를 강행한 이유에 대해 일본 대중 음악 콘텐츠를 수입하고 있는 제이브엔터테인먼트 이영일 대표는 색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한국 시장보다 일본 시장을 겨냥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복귀 실적이 좋지 않은 아무로 나미에가 한국 공연을 통해 일본에서 새로운 반향이 일기를 기대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일본 대중 음악 관계자들은 단기적으로 주춤하더라도 일본 대중 음악의 한국 진출이 꾸준히 시도될 것으로 전망한다. 일본 대중 문화 전문가인 이와부치 고이치 교수(국제기독교대학·국제관계학)는 “대중 음악의 ‘아시아 공영권’을 염두에 둔 일본은 한국을 중국 진출의 전초기지로 생각하기 때문에 꾸준히 공략할 것이다”라고 분석한다.

이와부치 교수는 일본 대중 문화의 아시아 진출이 ‘아시아에 속하지만 아시아를 뛰어넘는다’는 일본인의 신화를 실현시키는 문화적 국가주의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의 대중 문화는 서양 대중 문화의 아류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일본 대중 문화 상품은 타이완 등 동남아 지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다가 이내 시들어 버렸다.

사흘 간의 공연이 끝나고 아무로는 한류 후원 민간기관인 아시아문화산업 교류재단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공연은 제법 성공적이었지만 아무로는 한국 대중 음악 시장의 텃세 또한 겪어야 했다. 한국 가수들과 함께 한 마지막 날 공연은 파행으로 진행되었다. 앙코르 곡도 부르지 못했다. 이번 공연을 기획했던 한 관계자는 “앞으로 한동안 일본 가수 공연을 보기 힘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대중음악계의 변칙 플레이에 일본 대중 음악의 한국 진출은 당분간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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