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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이용 편리한 ‘문화의 집’ 개설 잇달아…문화를 마음껏 누리고 계발하는 마당
문체부, 읍·면·동에 1개씩 지을 계획
서울 서대문구에서 처음 문을 연 문화의 집은 한국에서는 대단히 낯선 집이다. 60~70년대 문화 복지를 실현하는 공간으로 생겨나기 시작해 지금은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일반화했지만, 한국에서는 문화 복지라는 말이 아직 생소하다. 교육·의료와 마찬가지로 문화를 복지 개념으로 인식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공간이 문화의 집이다. 해당 지역 주민이라면 누구나 문화의 집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문화 행동’을 누릴 수 있다. 물론 무료이다.
관이 기획·운영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문화의 집은 기존 문예회관이나 구민회관과는 성격이 크게 다르다. 백평 남짓한 작은 공간은 주민들이 직접 사용할 수 있는 시설들로 구성되어 있으며(상자 기사 참조), 무엇보다 주택 밀집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이용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80년대 말부터 전국에 들어서기 시작한 문예회관들이 비싼 땅값 때문에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 시민들과 일상적 접촉을 할 수 없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서울 서대문(02-3217-0359)에 이어 지난해 12월에는 경남 김해(0525-30-3429), 전북 정읍(0681-537-3005), 경북 풍기(0572-636-2868)에 문화의 집이 잇달아 문을 열었다. 문화체육부는 올해 말까지 15개, 2001년까지 백개, 2011년까지는 3백50개 이상을 지을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그때가 되면 전국의 웬만한 읍·면·동 들이 문화의 집을 갖게 된다. 지역 특성에 따라 성격만 조금씩 다를 뿐 기본 개념과 시설물은 똑같은 전국적인 문화 인프라가 구축되는 것이다.
“프로그램이 사람들을 유인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 스스로가 문화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주민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문화 욕구를 키우고 계발하도록 하는 것이 문화의 집의 가장 큰 목적이다.” 지난해 문체부의 의뢰를 받아 문화의 집 모델을 개발한 문화기획가 강준혁씨(스튜디오 메타 대표)는 문화의 집 핵심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강씨가 문화의 집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문화 환경이다. 건축가 이종호씨(스튜디오 메타 소장)가 설계를 맡은 공간은 연습실을 제외한 모든 곳이 트여 있으며, 분위기가 고급스럽다. 문화의 집 문을 열면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이미지 통합(CI) 작업을 거쳤기 때문에 상징 로고와 조형 구조물은 물론 벽·바닥·천장 색상까지 통일해 품위 있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농촌이든 도시든 똑같은 환경으로 꾸며놓은 문화의 집은 이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문화 행동을 펼칠 수 있게끔 유도한다. 서대문 문화의 집은 개관 이후 하루 평균 70여 명이 이용했으나, 아직까지 오디오·비디오·컴퓨터 등 최신형 기기들이 훼손된 일이 없다. 공간을 사용한 다음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이 상례화했다. 품위 있는 환경이 품위 있는 행동을 유발한 것이다.
문화의 집이 환경 다음으로 중시하는 개념은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창작 의욕을 실현하게 하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 문화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게 하고, 오디오·비디오 시스템, 첨단 영상기, 그리고 100인치 대형 화면은 음악감상실과 소극장 구실을 톡톡히 해낸다. <세계의 도시> <국악의 향기> <한국의 미> 등 일반 비디오점에서는 구해볼 수 없는 방송사 영상 자료와 국악·클래식 음반, 각종 예술 관련 전문 서적을 구비해 문화자료실로서의 기반도 세웠다. 비디오점에서 테이프를 빌려 가족과 함께 대형 스크린으로 보려는 이들에게도 문화관람실은 언제나 열려 있다.
개인 연습실과 공방은 일반인들이 공간 문제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문화 활동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소규모 콘서트나 전시회도 이곳에서 무료로 열 수 있다.
전문 인력·프로그램 확보가 성패 좌우
개별적인 문화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 못지 않게 중요한 구실을 하는 곳은 문화사랑방이다. 가족·동창·동호인 등 어떤 모임도 문화사랑방을 이용할 수 있다. 그 옆에는 주방기구가 설치되어 있어 차를 끓여서 마실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전북 정읍 문화의 집에서 모임을 가진 최자선씨(정읍시 공무원 부인들의 모임인 단풍회 회원)는“한 달에 한 번씩 회원 50명이 정기 모임을 관사에서 가져왔다. 경과 보고와 식사만 하면 끝나던 모임이, 문화의 집에서 열리면서 영화도 함께 보고 피아노 연주와 노래도 함께할 수 있는 모임으로 성격이 풍성하게 바뀌었다”라고 말했다. 지난달 서대문 문화의 집에서 처음 모임을 가진‘서태지와아이들 기념사업회’도 달마다 문화사랑방을 모임 장소로 활용할 참이다.
문체부가 2억원을 지원하고 지방자치단체가 규모에 따라 6천만~1억6천만원씩 들여 조성한 문화의 집은 건물을 새로 짓지 않고 기존 건물에 들어서고 있다. 경남 김해는 농촌지도소 건물을, 정읍은 여성회관 2층을 개조했다. 지방자치단체뿐 아니라 기업이든 개인이든 문화의 집을 운영할 의지와 공간만 있다면 문체부의 협조를 얻어 공간을 꾸밀 수 있다. 문화의 집 개념이 확정되고 모델하우스까지 나와 있는 지금은 적은 자본으로 손쉽게 문을 열 수 있는 기동성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문화의 집 앞에‘장밋빛 미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의 집을 운영하면서 새로운 문화 환경을 창출해 나가야 하는 전문 인력이 절대 부족한 데다, 전문 인력을 활용할 프로그램이 아직까지 구체화하지 않은 것이다. 인력이나 프로그램 등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에 대한 자치단체들의 인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문화의 집은 또 하나의 하드웨어만으로 주저앉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문체부가‘문화 프로그램 뱅크’를 만들어 각종 공연과 전시회를 순회하게 한다고 하지만, 지역 주민들이 찾아가 스스로 문화를 만들고 즐기는 자발적인 행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기존 회관들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관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지원하는 장치로 남아 있어야 한다. 관이 나서서 직접 운영할 게 아니라 그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문화의 집 모델 개발 용역 보고서>에서 양질의 전문가 집단이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제안한 강준혁씨의 말이다. 문화의 집이 지역 문화의 거점으로 성장하는 관건은 결국 고급스러운 하드웨어에 걸맞는 고급스러운 운영이라는 소프트웨어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