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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백정과 일본의 부락(민)이 손을 맞잡았다. 일본의 부락, 부락민? 대다수 한국인에게 일본의 부락(민)은 낯설다. 일본인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에게 한국의 백정은 생소하다. 백정과 부락민은 한·일 양국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핍박받아온 신분이라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 현주소는 서로 다르다. 백정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이는 반면, 부락(민)은 현대 일본 사회에 엄존한다. 엄존하되, 인권운동에 의한 해방의 대상으로 엄존한다.

소설가 정동주씨가 최근 일본에서 펴낸 <신의 지팡이>(네모토 리에 옮김·해방출판사)는 일본 사회에 한국 백정의 역사와 그 현실을 알리는 동시에 ‘일본의 백정’격인 부락(민)과의 연대(連帶)를 희망한다. 지난 2월6~7일 일본 오사카와 도쿄에서 열린 강연회와 출판기념회에서 정동주씨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백정과 부락 해방, 반차별 운동의 연대를 통해 인류의 비전이 마련되기를 바라면서 이 소설을 썼다.”

<신의 지팡이>를 번역 출판하고 정동주씨를 초청한 일본 부락해방연구소(소장 도모나가 겐죠)는 부락해방동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인권 단체다. 교육과 주거 환경, 결혼과 고용 등 삶의 도처에서 전방위적인 차별을 받고 있는 부락민을 ‘해방’하는 것이 부락해방연구소와 부락해방동맹의 존재 이유이다(상자 기사 참조). 그렇다고 부락 해방 운동이 부락에만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자·여성·재일 교포를 비롯한 외국인 문제 등 인권을 제약하는 모든 형태의 차별과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반차별국제운동(IMADR)과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오사카 해방회관(2월6일)과 도쿄 해방동맹중앙본부 겸 반차별국제운동 회관(2월 7일)에서 정동주씨는 ‘소설 <신의 지팡이>가 꿈꾸는 세계’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백정의 역사를 비롯해 백정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백정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백정에 깃들어 있는 미래성은 무엇인지 등을 역설했다.

‘백정’ 사라졌어도 차별 의식은 여전

<신의 지팡이>(국내에서는 우리문학사가 95년 말에 펴냈다)는 액자 소설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국문학과 교수이자 현역 작가인 박이주를 중심으로 하는 현실의 갈등, 즉 백정 후예들의 고뇌와 상처가 하나의 소설이고, 그 안에 박이주 교수의 베스트 셀러 <불우>가 액자로 끼워져 있다. 소설 속의 소설 <불우>는 70년대 학생운동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연인 한쌍을 축으로 설정하고 가족사의 비밀을 거슬러올라가는데, 그 비밀의 안쪽에 처절한 백정 수난사가 감추어져 있다.

백정 수난사는 정확히 말하면 백정의 아내, 백정의 어머니, 백정의 딸 등 백정 여성의 수난사이다. 정순개와 이고분이, 그리고 박이주로 이어지는 백정 여성 3대의 역사는, 백정에 대한 차별에다 여성 차별과 좌우익 갈등이 겹쳐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혹독한 차별을 받았음을 드러낸다. 박이주 교수는 ‘피’를 속이기 위해 호적을 바꾸고, 백정의 특수 언어를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으며, 공안 검사와 결혼해 사회적 지위를 탄탄하게 다지지만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피’에 대한 불안은 질기다.

소설은 여러 갈등이 동심원을 그린다. 백정과 지배자와의 갈등, 현실과 과거 사이의 갈등, 가족 내부의 갈등, 박이주의 내부 갈등, 남성과 여성의 갈등이 중첩되는데, 그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부딪치는 지점이 결혼이다. 우월한 ‘피’는 저열한 ‘피’를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 현대사는 차별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차별 문제를 공론화하지 않는다”라고 정동주씨는 말했다.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 운동에 관한 연구자는 많지만 백정 자체를 연구한 학자는 없다고 정씨는 지적했다. 물론 전통적 의미의 백정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백정에 대한 차별 의식은 아직도 단호하다. ‘백정놈 죽이고 살인 누명 쓰겠네’라는 속담에서처럼 신분 차별은 드러나지 않은 채 잠복해 있다.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고 있는 ‘불행의 씨앗’으로. “반차별 운동은 인간이 발견한 가장 큰 지혜”

강연에서 정씨는, 소설 속의 피차별 민중이 겉으로 누리고 있는 평등은 허약한 평등이라고 강조했다. 그 평등은 일제 시대의 독립운동, 좌우익의 사상 대립, 6·25 전쟁 등 시대가 격렬히 변화하는 와중에서 어부지리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허약한 평등 위에서 강력한 차별이 작동한다.

정동주씨는 부락 해방 운동과 반차별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일본인들을 ‘일본인이 아닌 세계인’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부락 해방 운동과 유엔 인권센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반차별국제운동에서 ‘새로운 일본이 태어나고 있다’고 본다.

2월7일 저녁, <아사히 신문> <일본경제신문> <문예춘추> 시사통신 등 일본 주요 언론사 중견 언론인들이 모인 도쿄 프레스센터에서 정동주씨는 “창세기 이래 인간이 발견한 가장 큰 지혜가 반차별 운동이다. 반차별 운동은 인간을 재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재발견하지 않는 한 미래는 인간의 것일 수 없다는 강조였다.

정씨는 백정과 부락 해방, 그리고 반차별국제운동 간의 결속을 낙관한다. 백정만한 생태주의자 혹은 생명운동이 없기 때문이다. 백정은 소를 죽이되 생명에 대한 지극한 외경심과 정성으로 죽인다. 백정은 축생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도구를 신의 지팡이(신팽이)라고 불렀던 샤먼이었다. 정동주씨는 “억압받은 자가 억압하는 자를 구원하는 위대한 정신이 조선의 백정 속에 있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한국 소설과 한국 문화가 일본에 소개된 경우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신의 지팡이>는 기왕의 문화 교류와 다른 차원에 놓인다. 한국의 백정과 일본의 부락(민), 전세계의 차별받은 인간이 문학이라는 가교 위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신의 지팡이>는 한·일 양국의 인권 운동을 하나로 묶으려 한다. 한·일 양국의 ‘가장 낮은 곳’에서 인류의 미래를 위한 비전이 기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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