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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일, 시기 점치며 각기 ‘히든 카드’ 준비
지난 5월 초 일본 정계는 재일 조총련 허종만 책임 부의장이 북한을 방문한 결과에 촉각을 세웠다. 그의 방북 결과에 따라 북·일 관계의 앞날이 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허부의장의 이번 방북은 김일성 85세 기념일인 지난 4월15일 경축 행사에 파견된 조총련 대표단 단장 자격으로 이루어졌다. 일정은 4월12일께부터 5월2일께까지였다.
북한을 방문하기 직전인 지난 4월 초순 허부의장은 일본 정계 고위 인사와 극비리에 만나 일본의 의표를 찌르는 제안을 했다. 일본인 소녀 납치 사건, 각성제 밀수 사건 등으로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북한과 일본 관계를 타개하기 위한 카드를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일본 정부가 식량 지원에 나설 경우 북송 일본인 처의 고향 방문이 실현될 수 있도록 북한 당국과 협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북송 일본인 처 고향 방문 문제는 91, 92년 북·일 수교 교섭 과정에서도 쟁점이 되었던 사안이어서 일본 정계로서는 빅 카드가 아닐 수 없다. 북한 역시 앞으로 있을 수교 교섭 재개에 대비해 비장의 카드로 간직해 왔던 것인데, 허부의장이 전격적으로 이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허부의장의 방북 결과가 어떠했는가는 그 뒤의 사태 진전에서 명확해진다. 북한에서 돌아온 직후인 5월 초 그는 이 정계 인사를 다시 만나 “북쪽 당국과 얘기가 잘됐다. 이 결과를 외무성에 통보해서 대북 식량 지원 분위기를 조성해 달라”고 말했다. 그를 메신저로 한 북·일간 비밀 교섭은 5월10~11일과 5월21~22일 북경에서 북·일 외무 당국의 비공식 접촉으로 이어졌고, 일본인 처 고향 방문과 일본의 대북 식량 지원 재개 문제를 공론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일 외교 당국이 접촉한 결과에 대해 지난 5월28일 일본 외무성 가토 료조 아시아국장은 “북한측이 (일본인 처의 고향 방문을 부분 허용하는 대신) 일본 정부의 대량 식량 지원을 끌어내려 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통고했다”라고 말했다. 문맥으로 보아서는 일본 정부가 대단히 소극적인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런가.
일본, 미국 입김 벗어나 독자적 대북 정책 추진
도쿄의 한 한반도 전문가의 증언을 토대로 살펴보면, 일본 외무성의 이같은 입장은 대외용 말 꾸미기라는 판단이 들게 된다. 그는 최근 전화 통화에서 일본 정부가 정부 차원의 대북 식량 지원을 위한 적절한 시기를 찾아 왔다고 전제하면서 “올해 9월이 아마 최적의 시기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그때까지 일본인 처의 부분적인 고향 방문이 실현돼 일본내 대북 정서가 완화될 것이고, 북한 내부 정세로 보아도 가장 적절한 시기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일본 정부가 북한에 제공할 식량은 약 50만t 정도라고 말했다. 이 50만t은 지난 5월21~22일 북경 접촉에서 북한측이 요구했던 양이기도 하다.
이 한반도 전문가의 증언에서 한 가지 의문점은 왜 하필 9월인가 하는 점이다. 그때쯤이면 북·일의 내부 사정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라는데, 일본은 그렇다고 쳐도 북한의 사정이란 무엇인가.
북한 식량 지원 문제에 대해서 일본은 올해 몇 가지 특징적인 입장을 보여 왔다. 95년 쌀 지원의 경우 미국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던 반면 이번에는 식량난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지원 방법, 시기 문제까지 ‘독자 노선’을 걷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일본 방위청 고위 당국자의 발언은 일본의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전화 통화에서 “일본은 북한 식량 문제에 대해 미국이나 국제 기구의 평가가 과장돼 있다고 판단한다. 북한 당국이 식량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이유는 식량난 때문이기도 하지만, 올해 7월 이후에 있을 김정일의 권력 승계 때 주민들에게 나누어줄 축하미를 확보하는 일이 더욱 절박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라고 지적한 것이다.
즉 일본은 식량 문제와 관련한 북한 당국의 절박성은 식량난 자체보다는 바로 승계 축하미 확보에 더 큰 비중이 주어져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 차원의 식량 지원이라는 `히든 카드를 사용해 북한과의 협상력을 높이려면 김정일 권력 승계를 전후한 `‘절박한 시기’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고, 바로 그 시기가 9월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은 김정일이 9월을 전후한 시기에 권력 승계를 할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허종만 부의장 방북단 역시 8월15일에서 10월10일 사이에 국가 주석과 당총비서를 순차적으로 승계할 것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한국은 어떤 복안을 준비하고 있는가
일본이 북한에 대해 히든 카드를 꺼내드는 시기는 미국 중국 등 주변국들의 움직임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동안 일본의 북한 정책은 한반도를 둘러싼 한국 미국 중국 등 주변 국가들 동향이라는 `‘모자이크 게임’에 적극 반응하는 형태로 추진되어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본의 동향을 추적하면 주변국의 움직임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그동안 미국의 북한 접근 동향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그것은 `미국보다 앞섬으로써 견제를 받는 것은 피하겠지만, 처짐으로써 북한이 미국 영향권에 장악되는 것은 수수방관하지 않겠다는 입장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이 9월이라는 시기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그 때를 전후해 미국 역시 히든 카드를 꺼내들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은 올해 세계식량계획(WFP) 등 국제 기구를 전면에 내세워 대북 식량 지원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정작 자기는 기금 약간을 유엔 기구에 지원한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 재정 문제 때문에 대규모 지원이 어려웠다면, 경제 제재 해제라는 `손쉬운 방법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카드를 슬쩍슬쩍 보여주기만 했을 뿐 결코 꺼내들지는 않았다. 그것은 미국 역시 경제 제재 해제를 대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히든 카드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동안 미·북한 협상에서 경제 제재 해제와 `‘교역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연락사무소 설치 문제이다. 최근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연락사무소와 관련한 일정은, `‘김정일 권력 승계 시점에 개설이 선언되고, 올해 11월께 개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즉, 권력 승계 직후 연락사무소와 미국의 경제 제재 해제를 맞교환함으로써 미·북한 관계의 극적인 진전을 북한 내외에 널리 선언하겠다는 계획으로 볼 수 있다.
대북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대척점에 서 있는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 역시 최근 히든 카드를 꺼내들었다. 바로 `‘강택민·김정일 정상회담 직후 대대적인 대북 원조’라는 카드이다. 중국은 지난해 두 차례 양국간 정상회담을 요구했고, 올해 4월에도 강택민 주석이 이와 관련한 친서를 보냈다고 한다. 중국은 그동안 김정일이 하루속히 권력을 승계해 북한 권력의 투명성을 대외에 보여주고, 또 강주석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중국의 입지를 인정할 경우 대대적으로 대북 지원에 나서겠다고 북한측에 설명해 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 북한은 7월8일 김일성 탈상이 끝나야 정상회담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김정일 역시 권력 승계 이후 미국·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할 카드로 중국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미국 중국 일본 그리고 심지어 북한까지 올 하반기에 전개될 한반도 지각 변동에 대비한 히든 카드를 준비해 두고 있다. 이런 각축전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카드를 준비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