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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민간단체, 북한에 북송선 탄 일본인 처 일시 귀국 요구… 북한이 쌀 지원 카드로 활용해 난항

‘열세 살 때 일본과 작별했는데, 이젠 쉰이 되었습니다. 조선(북한)에 건너온 세 자매 중 막내 가즈요리(和順)가 지난 1월2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친척도 없이 여동생 가즈에(和江)와 단둘이 남았습니다.

후미코상, 조선에 있는 저를 꼭 도와주십시오. 제발 부탁합니다. 어린애 옷이든 무엇이든 2,3년에 1개씩이라도 좋으니 보내 주십시오.’

이것은 함경북도 무산군에 거주하고 있는 영자(玲子·일본명 레이코)라는 여성이 지난 3월3일 도쿄 세다가야 구에 있는 ‘일본인 처 자유왕래 실현운동모임’(자유왕래 실현모임) 앞으로 부친 편지의 한 구절이다.

‘자유왕래 실현모임’의 이케다 후미코(池田文子) 회장에 따르면, 편지의 주인공은 37년 전 북송선을 타고 재일 동포 남편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간 ‘일본인 처’의 직계 가족으로 추정된다. 이 여성은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호소하면서, 일면식도 없는 후미코 회장에게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편지를 띄웠다.

40여 년 전 북송선을 타고 갈라진 또 하나의 ‘이산 가족’이 지금 일본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일본 법무성 통계에 따르면, 59년부터 시작된 ‘조국 귀환 사업’에 따라 재일 동포 남편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간 일본인 처는 모두 1천8백31명에 이른다. 편지를 쓴 여성과 같은 직계 자녀를 합치면 그 수는 6천7백여 명으로 늘어난다.

이들은 당시 일본이 극심한 불경기에 빠지자 ‘지상의 낙원’이라는 선전만 믿고 재일 동포 남편을 따라 북한으로 무작정 건너갔다. 물론 일본의 친지들은 그들을 한사코 말렸다.

북한, 일본인 처 1명당 쌀 만t 요구

그러나 그들은 ‘몇년 살아보다가 못살게 되면 다시 나오지’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59년 29명을 시작으로 82년(2명)까지 모두 1천8백31명이 북송선에 올랐다.

하지만 몇년이 아니라 38년이 지난 지금 일본 땅을 다시 밟은 ‘일본인 처’는 한 사람도 없다. 니이가타 시의 ‘재북조선 일본인 처 고향방문 실현모임’에 도착한 다음과 같은 편지가 그들의 절실한 망향의 염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흰 머리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게 외롭습니다. 3년 후 다시 돌아오겠다고 오니상(오빠)과 약속한 것이 어느덧 35년이 되었습니다. 그쪽에서 일본인 처들의 고향 방문 얘기는 안나오는지요. 역시 어려운 문제입니까? 앞으로 몇년을 더 살지 모르는 오바상(할머니)들이 하루라도 빨리 고향을 방문하고 싶은 심정을 꼭 헤아려 주십시오.’

일본에서는 일본인 처들의 간절한 귀국 희망 의사가 전해진 74년부터 그들에 대한 일시 귀국 운동이 일어났다. 자유왕래 실현모임은 85년 일본인 처 귀국 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새여 날개를 빌려주렴>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또 일본 정부는 일본인 처 1천8백31명이 아직도 일본의 공민권을 갖고 있는 엄연한 일본인이라는 점을 내세워, 외무성 아시아국을 통해 북한에 그들의 일시 귀국을 끈질기게 요구해 왔다.

그러나 북한은 ‘일본인 처는 어디까지나 북조선의 공민’이라며 일본측의 일시 귀국 요구를 ‘내정 간섭’이라고 반박해 왔다. 마지 못해 86년과 87년에 평양에서 가족 상봉을 허용한 것이 지금까지 북한이 허용한 인도적 조처의 전부이다.

지난 5월21~22일 북경에서 열린 북·일 외무부 과장급 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주요 의제로 거론되었다. 외무성 북동아시아과 벳쇼 고로(別所活郞) 과장은 이 회담에서, 귀국을 희망하는 일본인 처 전원의 일시 귀국을 북한측에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북한 외교부 김철호 일본 과장은 수십 명 단위의 일시 귀국을 제의한 것으로 알려져, 결국 이 회담은 아무런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끝났다.

<산케이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평양·원산 등 대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처는 모두 50명 정도이다. 이들은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 ‘모범적 일본인 처’로 외부에 소개되고 있다. 일본의 매스컴이 접촉할 수 있는 일본인 처도 이들에 한정되어 있다.
북한은 이들 모범적 일본인 처들의 일시 귀국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쌀 백만t을 일본측에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적게는 50명, 많으면 백명 정도의 일시 귀국을 허용한다면 일본인 처 1명당 몸값으로 최소한 쌀 만t을 요구하는 셈이다.

물론 북한이 일본인 처 일시 귀국을 허용한 대가로 쌀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 가을 북한은 자민당 아마자키 타쿠(山崎拓) 정조회장과 사회민주당을 통해 일본인 처 일시 귀국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일본에 제3차 쌀 지원을 요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뒤이어 터진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으로 양측의 접촉은 자연히 끝났다.

게다가 올 2월에는 북한 공작원에 의한 니이가타 소녀 납치 의혹이 불거졌다. 이어 4월 초에는 북한 화물선 지성2호가 각성제 70㎏을 밀반입하려다 일본 세관에 적발되기도 했다.

이러한 돌발 사건이 연이어 터짐에 따라 최근 북한에 대한 일본 여론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즉 납치 사건과 같은 비인도적 사건을 저질러 온 북한에 대해 왜 일본만이 인도적인 배려(쌀 지원)를 해야 하는가라는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이런 일본 사정을 모를 리 없다. 일본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그들은 지금 니이가타 소녀 납치 사건을 한국 안기부의 조작극으로 둘러대고, 각성제 밀수 사건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북한이 일본으로부터 쌀 지원을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일본인 처들에 대한 일시 귀국 허용이다.

소재 확인된 일본인 처 5백38명

자유왕래 실현모임의 이케다 회장은 김일성이 80년에 행한 ‘일본인 처들의 귀국을 환영한다’는 공식 발언을 상기시키면서, 그동안 너무 속아 이번에도 큰 기대는 걸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일본인 처들이 모두 환갑을 넘어섰고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부모형제들이 아흔 살 고령에 이르고 있어 하루라도 빨리 일시 귀국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유왕래 실현모임이 현재 소재를 파악하고 있는 일본인 처의 수는 모두 5백38명. 평양 36명, 함경남도 96명, 함경북도 70명 등 북한 전역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전체 1천8백31명의 약 30%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그 사이 사망했거나 강제수용소 등으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케다 회장은 일시 귀국에 앞서 이들의 소재 파악도 서둘러야 할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래야만 귀국 희망자를 개별적으로 판별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한편 일본인 처들의 일시 귀국에 따른 가족간 갈등도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96년 9월 말 자유왕래 실현모임에 도착한 한 편지를 보자. ‘존경하는 숙부님 숙모님, ○월○일 보내주신 돈을 잘 받았습니다. 일전에 숙모님이 돈을 빌리지 말라고 꾸짖었으나 생활이 어렵다 보니 꾼 돈이 2만원이 넘게 되었습니다. 숙모님이 보내주신 돈을 절약해서 쓰려고 노력하나 쌀값이 오르다 보니 돈 가치가 형편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경우는 일본의 친척이 일본인 처 가족을 적극 돌봐 주고 있는 경우이다. 반대로 작년 3월 니이가타 시의 ‘재북조선 고향방문 실현 모임’에 도착한 편지는 이산 가족 재회 전망이 보랏빛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애들이 성장해 아들과 딸의 결혼식 준비를 서둘러야 하나 생활이 어렵다 보니 아무런 준비를 할 수 없습니다. 아저씨 집 근방에 사는 ○○씨 집에 수차례 편지를 띄웠으나 아직까지 아무런 답장이 없습니다. 피가 이어진 사촌인데도…. 지금 제 수중에 만원, 2만원만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지 모르겠습니다.’

38년간 봉인되어 온 일본인 처의 고향 방문 문제가 하루아침에 타결될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일본인 이산 가족의 재회가 어떤 형태로든 실현된다면 한국의 이산 가족 상봉 문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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