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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 3사 디자인실, ‘자동차 미학’에 승부 걸고 소비자 기호 맞추려 총력전
김차장은 대우가 얼마 전부터 잇달아 내놓은 신차의 디자인을 담당한 디자인포럼을 이끌고 있다. 라노스와 레간자 디자인으로 호평을 받고 있는 그 역시 스스로 규정한 것처럼, 멋진 디자인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몽상가 부류에 속한다. 요즘 직접 몰고 다니기도 하는 이탈리아 알파로메오사의 스파이더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디자인이다. “독특하고 개성이 강한 디자인이 상상력을 유지하는 데는 그만이다.”
아직은 그보다 덜하겠지만, 대다수 승용차 소비자의 욕구 역시 김차장과 비슷해져 가고 있다. 가능하다면 근사하게 디자인된 차를 갖겠다는 욕구가 점차 간절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승용차 3사의 디자인실은 갑자기 각 승용차 회사의 ‘전략사령부’로 떠오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자들 출입이 쉽지 않았던 이곳에는 최근 격전장다운 비장한 느낌마저 감돈다.
이런 시기가 오리라는 것은 예견되었던 일이다. 가격이나 기술 경쟁 이후에는 어느 모로 보나 디자인이 절대적인 평가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큰 차일수록 디자인이 중요해진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기아자동차 디자인센터 담당 윤우룡 이사(50)의 설명을 들어 보자.
“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소형차는 디자인보다 값이 얼마인지, 몇 명이 탈 수 있는지, 또 얼마나 튼튼한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중·대형차(미국 기준으로 2천cc 이상)에서는 디자인과 색상이 더 중요해진다. 우리 자동차들이 외국에서 잘 안 팔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최근 국내 자동차 시장도 급속하게 중·대형차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디자인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일부 차종의 경우 여전히 외국 모델을 표절했다는 시비에 휘말리기는 하지만, 승용차 회사들은 대부분의 신형 차 디자인을 우리 손으로 직접 하기 시작했다. .
현대자동차는 경기도 남양만에 있는 종합기술연구소 내의 디자인센터가 디자인을 전담하고 있다. 디자이너 1백20여명(전체 인원은 2백여명)이 소속된 이곳은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독일 프랑크푸르트, 일본 요코하마 등 해외에 있는 디자인 연구소로부터 세계 시장의 디자인 흐름에 대한 정보를 공급받기도 한다.
현대의 디자인센터를 맡고 있는 박종서 상무(50)는 국내 자동차산업 초창기부터 자동차 디자인 외길을 걸어온 신화적인 인물. 그는 국내의 자동차 디자인 수준이 일본에 뒤지지는 않지만, 저변 기술이 뒤진 점이 흠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고무 제조 기술로는 여성의 입술처럼 탄력 있고 부드러운, 프랑스 차에 쓰인 것과 같은 고무를 생산하지 못한다. 그런 고무를 염두에 두고 디자인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의 취향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없애는 단순·담백형으로, 현대자동차의 모든 디자인 방향도 이런 쪽으로 설정해 두고 있다.
소비자 심리에서 경제 상황까지 꿰고 있어야
현대자동차의 디자인은 일반 소비자들로부터는 대체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지만, 자동차 디자인 전문가들 사이에서만큼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물론 모든 업체가 경쟁 업체의 디자인을 흉보기는 하지만). 스포츠카인 티뷰론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후한 점수를 주고 있지만, 나머지 모델들은 다소 부자연스러운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잘 팔리는 현대 차가 외국에 나가면 맥을 못추는 것도 국내외 소비자의 디자인 선호도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한 디자이너의 주장이다.
대우는 신차 시리즈(라노스·누비라·레간자)의 경우, 라디에이터 그릴을 통일해 정면만 보아도 금세 대우차임을 알 수 있게 해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는 대우그룹의 로고에서 착안한 것이다. 소비자들로부터는 비교적 호평을 받고 있지만, 일부 디자이너들은 레간자 디자인에 대해 표절 혐의를 두고 있기도 하다.
대우의 새 디자인들은 모두 서울 양평동에 있는 디자인포럼과 대우가 인수한 워딩연구소에서 나온 것이다. 영국에 있는 워딩연구소는 디자인포럼의 협력자인 동시에 경쟁자다. 이 연구소 출신인 김태완 차장은 “신차 디자인을 할 때는 인력이나 정보를 교환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자신들의 안이 채택되도록 경쟁하는 관계다”라고 말한다. 전체 백여 명에 이르는 디자인포럼 인력 가운데 자동차 디자이너는 50여 명.
기아의 디자인센터는 경기도 성남의 소하리 공장 후문 부근에 있다. 총 1백20여 명 인력 가운데 60여 명이 디자이너이며, 특정 학교 출신을 선호하는 다른 디자인실과 달리 개방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경영진의 간섭에서도 비교적 자유롭다.
자사가 만든 자동차 디자인에 대해서 자부심이 강한 편으로, 기아 차 디자인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평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국내보다는 외국 소비자를 겨냥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이상할 정도로 양감(量感) 있고 덩지가 커보이는 차를 선호하지만, 외국은 다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크레도스나 세피아는 외국인들에게 더 호평받을 수 있는 디자인이다.” 윤우룡 디자인센터 이사의 주장이다.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소비자의 심리뿐만 아니라 자동차 관련 기술의 추세, 나아가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등에 대해서까지 신경써야 한다. 그만큼 디자인과 관련해 소비자의 기호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많다는 얘기다. 어느 회사의 디자이너들이 변덕스러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이는 오는 연말께 승용차사들이 벌일 대회전을 감상하는 가장 멋진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