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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 낸 기업들, 높은 부채 비율· 무리한 사업 확장 등 조짐 미리 드러내

어떤 기업이 자금난을 겪고 있는지 파악하려는 금융기관 종사자들의 노력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들이 주요 고객 회사의 자금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은 각종 재무 비율을 종합해 판단하는 과학적 기법에서부터 고객 회사의 화장실 분위기를 관찰하는 ‘민간 요법’(이 기법 신봉자들은 화장실이야말로 그 회사의 氣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라고 믿는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믿었던 대기업들조차 예상치 못하게 쓰러져 버리는 요즘, 제2 금융권(단자·투신·보험·증권)에는 신종 기법까지 등장하고 있다. 자금 악화설이 나도는 기업에 실제로 어음을 교부해 보는 방법이다. 이 기업이 어음을 막아내면 별 문제가 없지만, 일단 어려워하는 낌새가 보이면 예외 없이 블랙리스트에 올려 놓게 된다. 이 기업에 대출된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지푸라기라도 잡지 못해 안달이 난 금융기관들이 이미 부도를 냈거나 부도 위기에 몰린 주요 기업들의 공통점을 본격적으로 검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기업들이 위기를 자초한 점만 찾아낼 수 있다면, 부도 예상 기업을 탐색하는 금융기관은 물론 기업 경영자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기업들 사이에는 유사하다고 할 만한 요소들이 있을까.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곽만순 연구위원은 “최근 부도를 냈거나 위기에 처한 대기업들 간에는 상당한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라고 주장한다. 경기가 사상 최악이 아닌데도 대기업들이 연쇄 부도를 내는 것은 일종의 ‘대기업병’ 때문이라는 얘기다.

경기 침체에 대응 못한 건설·유통 업종에 집중

이미 부도를 낸 업체나 최근 자금 악화설에 시달리는 기업 대부분은 특정 업종에 몰려 있다. 교보증권 리서치센터 이찬우 실장은 이런 기업들 대부분이 경기 침체, 그 가운데서도 부동산 경기 침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건설업체와 유통업체들이라고 주장한다. 건설업체들은 부동산 경기가 안정되기 시작한 김영삼 정부 들어 이미 부실화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유통업체들은 매출 감소 현상이 또렷해진 최근 들어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부도율 자체는 사상 최악이 아니었지만, 30대 기업조차 맥없이 나가 떨어진 지난 2∼3년처럼 증시에서 요주의 기업 리스트가 많이 떠돌았던 적도 없다. 최근에도 ‘한계 기업 리스트’가 몇 가지 나돈다. 각 기업의 매출액과 당기순이익, 현금 흐름 같은 재무 상황을 고려해 금융권에서 만들어낸 것으로 보이는 이들 리스트에는 30여 기업이 올라 있는데, 대부분이 건설과 유통 업종에 집중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이미 부도가 났거나 위기에 몰린 기업들은 우선 빚이 너무 많고, 불황기에도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는 데 몰두해 왔다. 자기 회사가 보유한 부동산을 끝까지 너무 믿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일부 경영 전문가들은 창업주에 이어 회사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물려받은 2세들의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이 부도 사태의 주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김영삼 정부 들어 부도를 낸 대기업들은 한결같이 부채 비율(부채를 자기 자본으로 나눈 것)이 높았다. 95년 말 부도 예측 모형을 내놓았던 한국경제연구원 남주하 연구위원은 부도 기업의 공통점으로 외부 차입금, 그 가운데서도 단기 차입금 의존이 높았다는 점을 꼽는다. 결국 금융 비용 부담이 지나치게 높아 수익성이 낮은 기업들이 부도 예상 기업이었다는 지적이다.

97년 3월을 기준으로 한 부채 비율 상위 10대 그룹을 보더라도 이런 가설이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왼쪽 도표 참조). 10대 그룹 가운데 3개사가 이미 부도를 냈거나 부도방지협약 적용 대상이 되었다(한보·삼미·진로). 이 밖에 3개 그룹은 이미 증시에서 자금 악화설이 나돌았거나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에는 기업이나 기업주의 능력은 외부에서 돈을 얼마나 끌어들일 수 있느냐는 데서 판가름이 났고, 외부 차입이 많은 그룹은 급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유망한 기업이었다. 그러나 이런 그룹들은 금융기관들이 몇 년 전부터 자금줄을 바짝 죄기 시작하면서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한국은행 자금부 도보은 조사역은 “금융기관이 대출을 꺼리고 어음 할인까지 어려워진 것이 최근 잇단 부도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이다”라고 진단한다.

‘황금알’ 부동산이 애물단지로 전락

부도 기업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금이 어려워지는데도 무리하게 사업 다각화나 확장을 시도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한보그룹은 건설업 위주의 업종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철산업에 대한 투자를 능력 이상으로 확대했고, 진로그룹 역시 주류산업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익성 없는 사업들에 손을 댔다. 이것이 두고두고 기업 경영에 부담으로 작용한 것이다.

“MBA에서 배울 수 없는 것도 많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경영 대권을 물려받은 2세들은 겉보기에 화려한 업종이나 사업 계획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 자금 조달 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무관심하다는 얘기다. 자금 담당을 거친 ㅅ그룹 현직 임원의 주장을 들어보자. “새로운 사업 계획이 어떤 것이든, 거기에 소요되는 자금의 최소 20%는 직접 조달해야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2세 경영자들은 자기 자금 조달 문제에 대해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외부에 사업 계획을 공표하고 만다. 아마도 하루빨리 사업을 확장해 아버지의 후광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국 기업 흥망사>의 저자로서 일부 대기업들의 몰락을 예언하기도 했던 공병호 자유기업센터 소장은 이를 기업인 특유의 내성(耐性)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동물원에 가두었던 동물은 야생 세계로 돌려보내면 곧 죽고 만다.” 직접 돈을 벌어 보지 못하거나 현장 경험이 짧은 2세들은 창업주에 비해 어느 때보다도 경쟁이 치열해진 현실 세계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재벌 2세들은 그들이 필수 코스처럼 생각하는 MBA(미국의 경영학 석사) 과정이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라고 지적한다.

부동산을 담보로 해서 가능한 한 많은 빚을 끌어들이고, 새로운 업종에 대해서는 과감하고 공격적으로 투자할 것. 이는 과거 우리 기업들에게는 일종의 ‘성공 공식’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경제의 성공 요인으로 칭송받던 것들이었다. 과거의 성공 요인이 오늘날 실패의 배경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끊임 없이 변화하는 경영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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