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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력 부재·계보 갈등 겹쳐 대권 주자들 애정 공세에 ‘흔들’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 담화가 발표되던 지난 5월30일, 신한국당내 최대 세력이자 민주계 계보 모임인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에 새벽부터 초비상이 걸렸다. 대통령 담화에 대한 걱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날 아침 한 조간 신문에는, 정발협 17인 중진 모임 멤버인 황낙주 전 국회의장과 목요상 의원이 이회창 대표 진영에 ‘투항’할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날 저녁에 열릴, 이대표를 지지하는 원내외 중진 모임에 이 두 사람이 참석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이대표측이 지지 모임을 다급히 취소하고, 두 의원 또한 그런 사실이 없다고 극구 부인함으로써 이 보도에 얽힌 소동은 한바탕 촌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눈길을 정발협 내부로 돌려보면 촌극으로 넘기기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감지된다. 서석재 정발협 공동 의장은 꼭두새벽에 이 보도를 접하고, 17인 중진들에게 급히 연락해 그날 아침 여의도 63빌딩에서 비공개 모임을 가졌다. ‘17인 모임’은 황낙주·목요상 의원을 출석시켜 해명을 듣고, 향후 정발협의 노선과 운영 문제 등을 논의했다. 17인 모임의 결론은 간단했다. 요컨대 세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는 당내 대권 주자들의 ‘정발협 공략’에 맞서서, 소속원들을 단속하겠다는 의사를 대외에 천명한다는 것이다.

그 날 서청원 간사장은 기자 간담회에서 “(정발협 핵심 인사 이탈 가능성 보도 등은) 정발협에 대한 음해이다.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라고 경고했다. 정발협 앞마당에서 당내 대권 주자들이 전쟁을 벌이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겠다는 얘기이다. 그 날 정발협 사무실은 계보원 단속하랴, 대권 주자들에게 경고 메시지 보내랴 하루 종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문제는 정발협이 현재의 결속력으로 이 눈치 저 눈치 안보고 덤벼드는 대권 주자들의 파상 공세를 견뎌낼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얘기가 이 대목에 이르면 정발협 지도부조차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일사불란하던 민주계 특유의 결속력이 약해졌고, 또 계보원들이 각개 격파 식으로 치고 들어오는 대권 주자들의 달콤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지도부가 구심력을 확보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당내 최대 계파인 정발협은 지금 본격적인 경선 국면을 맞아 ‘몸값’은 최대치로 뛰어올랐는데, 제몸을 지킬 만한 힘이 부족한 형국이다. 최형우계, 김덕룡계, 서석재계, YS 직계 등 정발협을 구성하고 있는 소계보들이 저마다 다른 계산을 하고 있는 데다가, 이들을 한 울타리에 묶어놓을 만한 지도력이 없는 탓이다. 이러한 지도력 부재와 소계보간 갈등 양상은 정발협 결성 이후 지금까지 몇 차례 겪은 고비 때마다 여지없이 드러났다.

우선 정발협은 김덕룡 의원 축출을 전후해 한 차례 위기를 맞았다. ‘세 확산 및 중립을 지키기 위한 대권 주자 배제’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언론에 먼저 노출되고 난 뒤 당사자인 김의원에게 통보하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김덕룡계로부터 반발을 샀다. 그 여파로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민정계를 영입해 공동 의장을 맡긴다는 안이 등장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민주계 소장파들로부터 ‘도대체 정발협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는 반발이 일었다. 한 민주계 소장 의원은 “중요한 것은 결속력 확보이지 세 확장이 아니다. 지도부가 결속력도 잃고 세 확장도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두 번째 위기는, 당헌 당규 개정 때 보인 정발협의 태도에서 빚어졌다. 당헌 당규 통과 여부를 놓고 이회창 대 반이회창 세력이 한판 붙을 것으로 예견됐던 5월21일 당무회의에서 캐스팅 보트를 쥔 정발협이 돌연 중립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그 날의 대결은 이대표측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애초 경선 시기 연기론이 주조를 이루었던 정발협이 이처럼 갑자기 방향을 선회하자, 당시 정가에는 ‘청와대로부터 가만히 있으라는 사인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대두되기도 했다.

‘대세 만들기’는 커녕 대세 뒤쫓는 신세 될지도

사실 정발협이 이처럼 갈지자걸음을 걷게 된 원인은 무엇보다 민주계의 오너 격인 YS가 중심을 잃은 데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으로, 주요 국면마다 어떤 경로를 통해 ‘김심’이 자꾸 정발협에 전달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정발협이 당초의 페이스를 잃고 있다는 얘기가 정발협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현재 정발협에 김심을 전달하는 메신저로는 서청원 간사장과 강삼재 의원이 지목되고 있다. 이미 정발협의 주도권은 서석재 최형우 김덕룡 등 상도동 1세대에서, 서청원 강삼재 등 2세대로 넘어갔다는 해석도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정발협을 결성한 목적은 ‘당내에서 가장 강력한 킹메이커는 민주계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민주계가 주도해 차기 정권을 창출하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당내 경선에서 외양적으로 중립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YS를 대신해, 정발협이 김심을 만들어내고 또 김심의 구미에 맞는 후보를 선택하겠다는 의도이다. 이는 정발협 결성 이후 민주계 중진들이 극비리에 청와대를 다녀오고 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현재 분위기대로 간다면, 정발협은 ‘대세 만들기’는커녕 ‘대세 뒤쫓기’에 바쁜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행동 통일이 안되는 상태에서 대권 주자들의 공략에 속도가 붙는다면, 정발협은 ‘내부 결속 후 특정 후보 지지 표명’이라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보지도 못할 운명에 처할 수가 있다. 이미 정발협내 소계보들이 제 갈길을 걷는 징후는 속속 드러나고 있다.

‘21세기 국가경영연구회’를 발족시킨 DR(김덕룡 의원의 머리글자)계 위원장들이 정발협에 합류하지 않고 있는 점도 그렇고, 이수성 고문이 溫山(최형우 고문의 아호)계를 잡기 위해 5월29일 저녁 최고문 지지 세력인 ‘정동 포럼’(회장 송천영 전 의원) 멤버들을 초청해 만찬을 가진 것도 심상치 않다. 특히 정발협내 이수성 지지 기류는 지도부의 경고 발언에도 불구하고 점점 확산되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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