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대통령 발언으로 다시 도마에…여권 ‘자유투표제로 돌파’ 비책 마련
아울러 ‘식물 특위’나 다름 없었던 국회 ‘정치구조 개혁 입법 특위’(정개특위)도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정개특위는 98년 12월 처음 가동되었지만, 지난 3월 이후에는 인사청문회 도입 등을 둘러싼 이견으로 인해 여야간 힘겨루기만을 계속하다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자동 해체되었다. 정개특위의 의제는 국회의원 정수 조정, 예산결산위원회 상설화 등 수두룩하게 쌓여 있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이 특위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을 빚을 부분은 선거구제 문제이다. 내년 총선을 치를 선거구제 형태가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따라 선거구가 통합되거나 없어질 수 있어 상당수 의원들의‘운명’이 걸려 있는 협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권, 한나라당 수도권 중진 이탈 노려
공동 여당은 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3명을 뽑는 1구 3인 중선거구제를 일찌감치 당론으로 확정했고, 한나라당은 이에 맞서 소선거구제 당론을 고수해 왔다. 물론 공동 여당의 내각제 개헌이 총선 이후로 미루어지면서 여권 내에서도 소선거구제 회귀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김대통령의 이번 언급으로 인해 소선거구제 목소리는 당내에서 급격히 잦아들 전망이다.
김대통령이 중선거구제를 강조한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기존 당론을 확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두 차례 언급에 공통으로 깔려 있는 논리는 ‘망국적 지역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중선거구제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명분론 외에도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중선거구제에 다시 불을 지피기 시작한 데는 국민회의의 현실적 고민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국민회의가 최근 하락하고 있는 당 지지율로는 소선거구제에서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에 중선거구제 추진에 나섰다고 지적한다.
김대통령이 말한 대로 중선거구제가 지역 감정을 해소하고 돈 안드는 정치를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은 사실이다. 경상도에서 국민회의 의원 몇 명 당선시키고 전라도에서 한나라당 의원 몇 명 당선시킨다고 지역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과 같은 ‘싹쓸이 지역 정당’ 현상은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 전반을 물갈이할 만한 신진 인사들을 등용하는 데도 유리하다. 물론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선거구제 선호론자들은 2∼3등이 당선할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에 이름이 덜 알려진 무명 신인들이 중선거구제를 통해 국회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데 비해, 소선거구제론자들은 선거구가 넓어지면 이름이 덜 알려진 신진 인사들이 지역구민을 상대로 이름을 알리기가 힘들어 당선되기가 더 어렵다는 주장을 편다.
또 소선거구제가 1등만 살아 남고 나머지는 모두 탈락하는 ‘제로섬 게임’이어서 경쟁을 격화시킨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에게,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일부 소선거구제론자들은 선거 이후에는 오히려 중선거구제가 경쟁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반론을 편다. 지역구 행사에 한 의원이 참석하면 다른 의원들도 서로 눈치를 보느라 ‘울며 겨자먹기’로 참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선거구제가 지역구 관리 부담에서 벗어나 중앙 정치에 몰두할 수 있게 하기는커녕 지역에서의 소모적 경쟁을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선거구제 문제에 관한 양론 속에서 김대통령이 잡은 풀이말(키워드)은 ‘지역 감정 극복’이었다.
그러나 이런 명분론과 현실론의 바탕 위에서 국민회의가 선택한 중선거구제가 실제로 성사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한나라당이 소선거구제 당론을 고집해 중선거구제에 합의해 주지 않으면 여당으로서도 뾰족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 여당의 중선거구제 방안 마련에 참여했던 여권 관계자의 고백을 들으면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공동 여당의 중선거구제안은 결국 국회 표결 과정에서 자유투표제를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수도권 출신 중진들은 여권이 연합 공천을 통해 중량급 후보를 내세운다면 침몰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한나라당 의원들로서도 중선거구제를 통해 함께 사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종의 틈새 벌리기 전략이다. 한나라당이 연합 공천에 대해 위헌 시비를 제기하는 것도 단순히 자기 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표면적 이유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여권의 노림수를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 여당 처지에서는 선거구제에 관한 한 크로스 보팅, 즉 자유투표제라는 절차에 대해 야당의 동의를 끌어내기가 선거구제 자체에 대한 야당의 합의를 끌어내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 야당도 자유투표제 방식까지 거부하기에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자유투표제를 선택할 경우 공동 여당의 한 축인 자민련 의원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중요한 변수 중의 하나이다. 현재 자민련은 김대통령이 중선거구제를 천명한 이후 ‘야당과의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만 밝히며 명확한 입장 표명을 유보하고 있다. 자민련은 이미 중선거구제 당론을 확정해 놓았지만, 내부의 분위기는 중선거구제보다는 소선거구제를 선호하는 편이다. 전국 지구당위원장을 상대로 한 선거구 관련 여론조사에서도 60% 이상이 소선거구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선거구제가 실시되었을 때 충청권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자민련 상표로 당선될 수 있는 후보가 별로 없다는 점을 자민련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형편이다.
자민련 당론은 중선거구, 마음은 소선거구
물론 자민련 의원 대부분이 이처럼 소선거구제를 선호하기는 하지만 청와대와 공동 여당이 중선거구제를 추진한다고 할 때 김용환 부총재 계열의 일부 의원 외에는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드러내지는 않을 것 같다. 김종필 국무총리의 충남 부여 지역구를 물려받은 김학원 의원도 “소선거구제를 지지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당론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그러나 만약 자유투표제에 합의하게 되면 소선거구제 유지라는 본심을 드러내는 의원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어 청와대와 국민회의는 중선거구제 관철을 위한 고차 방정식을 풀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옷 로비 청문회와 파업 유도 청문회를 계기로 더욱 인기가 떨어져 버린 국회의원들이 그나마 내년 총선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어느 총선 때보다도 선거구 획정 문제에 매달릴 전망이다. 김대통령의 언급으로 여권 안에서도 ‘뜨거운 감자’가 되어 버린 중선거구제 문제는 그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선거구제 문제가 실제 유권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지는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김영래 교수(아주대·정치외교학)는 “일본에서도 선거구제를 바꾸려고 3년 동안 논란을 벌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극히 최근 들어 청와대와 국회 일부에서만 선거구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 선거구제 개혁이 정치 개혁과는 먼 길로 갈 수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10월20일까지로 활동 시한을 정해 놓은 정개특위가 그 이름에 걸맞는 선거구제 ‘개혁’을 이루어낼지 관심이 모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