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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적극 지지 거두고 비판 강화… ‘노동법 싸움’ 대세 갈라

김수환 추기경. 그는 한국 사회에서 참으로 독특한 입지와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영향력은 〈시사저널〉이 해마다 실시하는 여론조사‘한국을 움직이는 10인’에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는 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지난해에는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권 3김씨에 이어 4위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개정 노동법 처리를 둘러싼 여야 대치 정국에서 그는 사실상 3김씨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 측면이 있다.

김추기경의 단호하리만큼 분명한 입장 표명은 넥타이 부대의 대규모 저항, 지식인 집단의 다양한 반론과 함께 이번 싸움의 대세를 갈라 놓았다. 그는 전개되는 시국 상황에 따라 조건 없는 텔레비전 토론 수용, 집권 세력의 사고(思考) 전환을 촉구하면서 국민 여론을 주도했다. 그는 지난 1월18일 이한동·박찬종 신한국당 고문의 잇단 예방을 받고 자신의 시국관과 수습 대책을 밝히는 자리에서 전례 없이 직접 화법을 구사하기도 했다. 특히 김대통령의 독선을 암시하는 듯한‘법 집행에 대한 옹졸한 고집을 버려야 한다’는 추기경의 고언(苦言)은 정가에 민감한 파장을 낳았다.

“위기 정국의 심판 역할 했다”

그런 만큼 정치권에서는 김추기경이 사실상‘위기 정국의 심판’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김대통령이 영수회담 절대 불가라는 강경 방침에서 한 발짝 물러나 여·야당 대표와 회담을 제의한 데에는, 김대통령과 단독 회동한 뒤에도 정치권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여권의 완고한 인식을 질타한 김추기경의 태도도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18일 신한국당의 두 고문과 김추기경이 나눈 대화를 보고받고‘큰일났다’면서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홍구 신한국당 대표가 같은 날 김추기경의 조건 없이 텔레비전 토론을 수용하라는 발언에 대해 ‘우리나라가 로마 시대로 돌아가는 것 같다’라면서 불쾌감을 드러낸 것도, 따지고 보면 추기경의 사회적 영향력을 크게 의식했기 때문이다.

현 정부에 대한 김추기경의 신랄한 비판과 지적에 여권이 크게 당혹해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추기경이야말로 문민 정부와 김영삼 대통령에게 가장 든든한‘빽’이었기 때문이다.

문민 정부 출범 초기에 김추기경은 문민 정부의 개혁에 동참하자고 공개적으로 호소했다. ‘문민의 개혁은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허락한 기회’라는 것이 김추기경의 인식이었다. 그의 발언은 문민 정부가 개혁을 할 만한 정통성과 자격을 갖추었으며 우리 시대가 개혁을 요구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원론 수준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93년 4월 일간지 종교 담당 기자 간담회에서 “김대통령의 국정 개혁은 국민이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수구 세력이 나타나면 나라를 위해 이를 저지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서강대 동문회 초청 강연회에서는 경제인들이 신한국 건설에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초기 개혁 과정에서 기득권을 상실한 5·6공 수구 세력이 반격할 조짐과 군 쿠데타설이 언론에 보도되고, 사상 초유의 문민 정부를 지켜보는 국민 사이에 정체 모를 불안 심리가 고개를 들 무렵이었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나온 추기경의 ‘지지’발언은, 추기경의 의도가 어떠했건 상관 없이 김대통령과 문민 정권에게 강력한 정치 밑천이 되어 주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민자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일방 통행식 YS 개혁의 문제점을 따지고 드는 야당 의원에게 ‘김수환 추기경도 잘한다고 하지 않느냐. 잘할 때는 잘한다고 해야지 무조건 비판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라며 김을 빼기도 했다. 자연히 야권에서는 ‘추기경이 YS 정권을 너무 도와주는 게 아니냐. 예전의 추기경이 아니다’라는 불만도 터져나왔다. 교회내 진보적인 사제 그룹에서도 걱정하는 이야기가 오갔다.

문민 정부 초기만 해도 YS 개혁에 이처럼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김추기경이 비판적으로 돌아선 시점은 분명치 않다. 교계 내부에서도 그에 대해서는, 95년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한 뒤부터 현 정권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는 관측과, 지난해 15대 국회 개원을 놓고 여야가 벼랑 끝 대치를 할 때부터 김대통령의 정국 운영 방식에 강한 회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관측이 엇갈린다.

김추기경은 만 75세가 되는 5월이면, 교회법에 따라 서울대교구장 직을 물러나겠다는 뜻을 지난해에 밝혔다. 자연스러운 몸으로 사목 활동을 하게 될 그는 올해도 여전히 ‘한국을 움직이는 인물’로 꼽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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