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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개혁 투쟁으로 진일보 모색
그렇지만 학생운동권은 이 논쟁을 통해 중대한 합의을 끌어낼 수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땅 변혁 운동의 주체 세력은 민중, 특히 노동자’라는 것이었다. 궁극적 지향점이 설정되자 숱한‘학생 투사’들의 진로는 자연스럽게 결정났다. 80년대 초·중반 학생운동권에서 맹위를 떨친‘운동 정리=노동 현장으로의 존재 이전’원칙은 이렇게 해서 확립되었다.
노동상담소 등 노동 외곽 단체서 활약
고려대 출신으로 현장 활동을 해온 지 올해로 꼭 10년째인 김숙자씨(불문과 83학번)도 이같은 원칙을 충실히 따른 운동권 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다. “현장 투신은 감옥에서 나온 직후인 87년 2월부터 준비했다. 그 해 가을, 이미 현장에서 활동하던 선배와 선이 닿아 비슷하게 진로를 준비하고 있던 다른 대학 출신 학우 서넛과 함께 현장으로 들어갔다. 운동 꽤나 했다는 학생들 사이에서 나와 같은 진로 결정은 당시에 거의 공식이나 다름없었다.”
집에서 알면 붙잡히게 될 것이 틀림없어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온 김씨가 맨 처음 ‘위장 취업’한 곳은 인천에 있는 규모가 제법 큰 카세트테이프 공장이었다. 그 뒤 김씨는 당국의 감시와 신분 노출 위험 때문에 인천에서 충주로, 다시 서울 구로역으로 옮겨다니며 ‘현장 활동가’로서 고단한 삶을 계속해 왔다. 김씨는 아직도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있다. 93년 결혼한 뒤 지금은 집안 살림 때문에 구로청년회라는 ‘외곽 단체’로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그의 활동 근거지는 여전히 구로 지역 노동 현장이며, 활동의 대상 역시 이 지역 공장에서 일하는 생산직 근로자들이다.
80년대 초·중반 학교 도서관보다는 시위 현장에서, 책과 가방보다는 돌과 화염병을 들고 있는 모습을 훨씬 마음 편하게 여기던 사람들. 서슬 퍼런 군사 정권에 맞서 ‘반파쇼’와 ‘양키 고 홈’을 외쳤던 사람들. 84년 청계피복 노조원·구로공단 근로자들과 어깨 겯고 싸우고, 85년 서울 미국문화원을 점거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사람들. 뒤이어 86년 건국대 사태를 촉발하고, 이듬해 6월 마침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6·29 선언’을 이끌어내며 민주화에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던 사람들. 이른바 6·10 항쟁 세대의 상당수는 지금 현장을 지키고 있다.
전남 순천 지역에서 손꼽히는 노동운동 조직가로 성장한 허 석씨(서울대 경제과 82학번)도 그들 중 하나다. 허씨가 현장에 들어간 것은 학생운동권에서 현장으로 존재 이전이 아직 완전히 본격화하기 전인 84년께였다. “방학 때 구로공단에 나가 공활(공장 활동)을 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현장 이전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이라 개인 차원에서 현장을 택했다. 인천·안양 등지를 전전하다 6·10 항쟁 뒤에 고향으로 내려왔다.”
89년 고향에 내려간 허씨는 91년 몇몇 동지를 규합해 ‘새벽을 여는 노동문제 연구소’ 문을 열고 인근 여천·광양 지역 공단 사업장을 대상으로 노조 결성 활동을 벌였다. 허씨는 지금도 현장 근로자와 노조를 상대로 임금 문제나 산재, 단체협약 따위를 상담하며 지역 노동운동 발전에 일익을 맡고 있다.
허씨처럼 6·10 항쟁을 전후해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노동판에 뛰어든 사람들 대부분은, 10년이 지난 오늘날 생산 현장에서 일단 비켜서서 노동상담소·노동회관·연구소 같은 외곽 단체 또는 지역 단위 노조단체·상급 노조 따위에서 조직가로 살아 가고 있다. 85년 7월 〈일보전진〉이라는 ‘불온 책자’를 펴낸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출옥 후 고향 근처인 마창 지역으로 내려간 김훤주씨(고려대 불문과 82학번)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창원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김씨가 현재 맡고 있는 직책은 마·창지역 진보정치연합 부위원장. “87년 7·8월 대투쟁이 있기 전까지는 소규모 영세 사업장, 일명 ‘마찌꼬바’에 취직해 일하면서 민주 노조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대투쟁의 영향으로 노동운동의 역량이 크게 고양되면서 일단 생산 현장에서 빠져나왔다. 활동 방향을 수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초 현장으로 갔던 사람들 상당수가 생산 현장에서 일단 비켜서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가장 큰 계기는 노동운동계가 처한 상황의 대변화였다. 87년 6월 항쟁과 그에 이은 7·8월 대투쟁의 결과, 노동운동은 과거 비합법·비공개 단계에서 합법·공개 단계로 진입할 공간을 얻었다. 노동운동 자체만 놓고 보면 외부 도움 없이 발전할 수 있는 이른바 ‘자체 동력’을 확보했으며, 운동의 방향 또한 경제 투쟁에서 전반적인 사회 개혁 투쟁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운동 방식(또는 투쟁 방식)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구로청년회 김숙자씨는 “아직 단위 노조를 중심으로 경제 투쟁을 벌여야 할 필요성이 있긴 하지만 중심축은 크게 이동했다. 많은 동료가 과거 노동자 권리 투쟁에서 한 걸음 나아가 사회 개혁 투쟁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라고 말한다.6·10세대는 ‘노동운동 핵심’ 될 수 없다
87년 대선과 92년 대선을 전후해 ‘동료들의 이탈’이라는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80년대 초·중반 현장에 대거 몰려간 현장 활동가들은 80년대 후반부터 노동운동에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진보적인 노동운동 사가들은 84년 이후 구로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민주노조 결성운동, 인천 대우자동차 노조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는 86년 구로연대투쟁, 그리고 이같은 운동의 종합·결정판인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이들의 주요 공적으로 꼽고 있다.
이같은 성과를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노동계의 6·10세대가 겪은 어려움은 만만치 않다. 마·창지역 진보정치연합 김훤주 부위원장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한창 어려울 때에는 단돈 5만원으로 한 달 생계를 해결해야 할 때도 있었다. 아내 역시 노조 일을 하느라 이리저리 쫓겨다니기 일쑤여서 변변한 벌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참기 어려웠던 것은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운동의 전망을 찾지 못해 하나 둘씩 현장을 뜰 때였다. 지금은 그저 떠나간 동료들이 아쉽게 느껴지지만, 당시에는 견디기 힘들었다”라고 되돌아본다.
또 다른 어려움은 여전히 걷히지 않고 있는 당국의 감시 눈초리이다. 현장 활동가들에 따르면, 예전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아졌지만 공안 사건이 터지거나 사회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꼬투리가 잡힐 소지가 많아 특히 몸조심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끌려 갈지 모르는’ 불안정한 생활, 이중삼중으로 겪는 생활고, 순수 노동자들과 융합하는 어려움, 운동을 포기했을 경우 발생할 반사 이익에 대한 기대감 등은 언제든지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을 현장에서 내몰 위험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적어도 10년 넘게 현장을 지켜온 노동계의 6·10세대에게‘변혁 운동 중심=노동운동’공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간의 성과를 발판으로 삼아 최근 민노총 지부 결성 작업에 부쩍 힘을 쏟는 허 석씨는 “지금 단계의 노동운동에서는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이 운동의 선도자는 될 수 있어도 핵심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의 일도 운동을 지도하는 쪽에서 지원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더라도 노동운동의 기본 방향은 지켜야 한다”라고 말한다. 변화한 상황에 맞게 처신하되 현장을 떠날 수는 없다는 얘기다.
6·10 항쟁이 터진 지 올해로 꼭 10년. 현장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항쟁의 정신을 충실히 살리는 ‘진정한 계승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