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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당을 반쯤 혼이 나가게 만든 노동법 파문의 핵심은 민심 이반이다. 그 원인을 놓고 해석이 분분했는데, 주로 정치적 문제로 모아졌다. 노동법 날치기 처리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폭발했다든지, 대통령의 독선적 연두 기자회견이 화근이었다는 분석, 여기에 현 정권의 4년 통치 행태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표출되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번 대규모 민심 이반 사태의 근본 원인은 그리 복잡한 분석이 필요치 않아 보인다. 그 답은 시위 현장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1월 중순 명동성당 집회에 가족을 모두 데리고 나온 한 근로자 부인은 “앞으로는 기업이 사원을 마음대로 자르게 길을 터줬다는데,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이미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버려졌는가를 보고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관리직 사원이어서 그동안 후배 사원들의 파업·시위를 막는 쪽에 서 왔다는 서울 시내 상업은행의 한 지점 김종철 차장은, 1월15일 최루가스가 매캐한 탑골공원 파업 집회장에서 자기가 왜 집회에 동참했는지를 이렇게 말했다. “은행계에 닥칠 감원 선풍으로 우리 은행에서만 1천5백명을 자른다, 30%를 자른다 해서 분위기가 뒤숭숭한데 그냥 앉아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간부들도 집회에 많이 나왔다. 못 나오는 간부는 음료수 상자라도 들고 노조 사무실로 찾아가 후배들 어깨를 다독거리는 분위기다.”

정부·여당은 노동법 내용에 오해가 있어서 설득하면 된다고 했지만 결코 설득될 민심이 아니었다. 경제 회복 슬로건과 선진국형 고용제도 도입 등 정부가 내건 경제 논리는 광범위하게 번진 국민의 실업 불안 심리를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실업 불안 심리 확산시킨 노동법 파동

이처럼 97년 벽두부터 민심을 흉흉하게 만든 노동법 파문의 밑바닥에는 실업에 대한 불안 심리가 자리잡고 있다. 실업 불안 심리는 이미 해고된 사람들이 사회에서 보여주는 모습 때문에 더욱 증폭되었다. 이미 해고된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 사회 불안 심리가 확대되는 데 불씨가 되는 현상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서울 등 대도시에서 매달 2백만~4백만원대의 수입으로 안정된 중산층 생활을 하다 하루아침에 실직되어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사람을 보기는 어렵지 않다. 노동부 각 지방사무소에는 실업 급여를 타기 위해 백여 명씩 줄을 서는 일이 일상화했다. 창업박람회장에는 하루에도 실직자 만여 명(예비 실직자 포함)이 몰렸다. 신문·잡지에는 실직자들을 겨냥한 직업 소개 및 사업 설명회 광고가 봇물 터지듯 실리고 있다.

실직자들은 일단 회사를 나온 뒤 말없이 사회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 보였지만, 그 파문은 이처럼 갖가지 사회 현상으로 되살아나 민심을 자극하고 있다. 더구나 대다수 실직자가 겪는 절망과 고통은 알게 모르게 직장에 남아 있는 현직자들에게 ‘거울’ 구실을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한국노동연구원 유길상 박사는 “국민이 실업 문제에 심리적 타격을 크게 받는 것은 지난해 노동법 개정을 앞두고 일부 대기업이 요란하게 치고 나가면서 생긴 부작용이다. 기업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경제 위기를 부각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국민에게 실업 불안 심리를 지나치게 고조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왔다”라고 말한다.비인간적으로 퇴직당한 사람들의 비극

해고자들이 겪는 길을 생생히 지켜보는 현직자들의 불안 심리는 우선 해고 과정의 비참함과 허탈감에서부터 시작된다.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인 ㅅ건설에서 공적과장으로 있다가 지난해 3월23일 퇴직한 양 아무개씨(46)의 경험은 비인간적으로 퇴직을 종용당한 전형적 사례이다.

“지난해 1월 초 인사담당 이사가 불러서 찾아갔더니 회사 재무제표를 내밀고 퇴직금 외에 3개월치 봉급을 제시하며 나가 달라고 했다. 왜 하필 내가 그 대상인가를 따지며 버텼더니 며칠 뒤 다른 제안이 들어왔다. 퇴사와 울산지점 자재과 근무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었다. 동료 과장급 4명이 같은 경우로 불려갔는데 모두 사표를 썼지만 나는 버텼다. 3개월째 버티니까 회사는 결국 인사명령 불복종, 근무지 이탈로 징계 해고를 들이댔다. 징계 해고가 되면 실업 급여조차 못받는다. 결국 나는 사직서 내용에 ‘회사의 사직 강요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아 업무를 수행할 수 없어 사직함’이라고 쓰고 나왔다.”

3개월간 회사측과 힘겨운 씨름을 벌인 끝에 실직자가 된 양씨는 이 일로 불면증에 시달리는가 하면 분을 삭이지 못해 숨을 쉬다가도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양씨와 달리 상당수의 대기업은 명예퇴직제도라 해서 적게는 3개월치부터 많게는 3년치에 이르는 봉급을 웃돈으로 얹어 순순히 퇴사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퇴사 종용을 받은 뒤부터 허탈감에 빠지기는 마찬가지다. 대부분 ‘왜 하필 내가 그 대상에 끼었는가’ 하는 반발 심리를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퇴직자들이 보편적으로 갖게 되는 이런 초기 심리 상태를 정신과 전문의들은 ‘적응 장애’라고 표현한다. 연세대 신경정신과 고경봉 전문의는 이와 관련해 “퇴직자들은 평생 회사일밖에 모르고 살다가 일시에 역할이 없어짐으로써 사는 맛까지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대개 증상이 심각해진 뒤 병원을 찾는데 우울증이 주요 증상이다. 인생이 갑자기 뒤틀림으로써 모든 일에 전에 없는 과민 반응을 보이고 신체 기능에도 두통·설사 등 과민성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퇴직 당시 충격과 허탈감을 스스로 잘 소화해낸 실직자들이라 해도 새로 맞닥뜨리는 문제가 있다. 가정 문제다. 특히 자녀들 보기가 민망한 가장들은 퇴직 초기에는 대부분 자녀 등교 시간에 맞춰 평소처럼 집을 나선다. 관악산·도봉산을 오르기도 하고 3류 극장을 전전하며 시간을 보낸다. 모처럼의 해방감도 없지 않지만 대략 3개월이 고비다. 갈곳이 없어진다. 구직을 위해 이곳저곳 서류도 넣고 찾아가 보지만 벽은 높다. 이 과정에서 깊어가는 절망감을 푸는 대상은 매일 얼굴을 맞대는 가족이 되기가 십상이다.실직자 노리는 전문 사기단 활개

실직 문제가 가정 문제로까지 비화해 이혼 위기에 처한 극단적인 예도 없지 않다. 2년 전 서울의 한 대기업 부장으로 있다 명예 퇴직한 김상원씨(53)는 요즘 ‘이혼 공포증’에 시달린다. 퇴직 뒤 아내와 함께 1개월간 외국을 여행하고 온 김씨는 재취업을 위해 중소기업 자금담당 간부 자리를 알아보러 다녔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김씨는 실직 후 6개월이 지나 재취업 포기 상태에 빠지면서 퇴직금으로 아내에게 여성 의류점을 차려 주었다.

새로운 길을 찾은 것으로 보였던 김씨의 가정에 문제가 생긴 것은 그때부터였다. 아내가 가게 문을 닫고 들어오는 시간대가 자정 무렵인데,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던 김씨는 아내의 늦은 귀가를 문제삼다 차츰 의처증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하루 종일 가게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밤 늦게 귀가하는 김씨의 아내가 “왜 바보같이 밤낮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느냐, 노동판에라도 나가라”는 식으로 맞받아치면서 불화는 깊어만 갔다. 결국 김씨의 아내는 의처증을 견디다 못해 이혼을 요구했다. 김씨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부인은 재산을 압류한 뒤 이혼청구소송을 냈다. 상담 창구에서 기자와 만난 김씨는 “이혼은 죽어도 하기 싫지만 아내가 너무 완강해 답답하다. 직장을 떠나면서 모든 것이 꼬이게 됐다고 생각하면 그때 버티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라고 말한다.

김씨 같은 경우는 극단적인 경우겠지만 퇴직자들이 실직으로 인해 크고 작은 가정 문제에 시달리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다. 예전처럼 자식들을 불러 훈계할 수도 없고, 집안 경조사에 얼굴을 비치는 것조차 기피하고 싶은 것이다.

실직자들이 이같은 각종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지름길이 원만한 재취업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 길은 험난하다. 재취업의 경우 전반적인 경기 불황 탓에 이들을 쓰고자 하는 기업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또 최근 40, 50대 사무관리직 실직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중소기업에서 자금담당 이사나 기술 분야 현장 소장을 찾는 극소수 사례를 제외하면 이들이 재취업해 설 땅은 없다. 결국 실직자들은 재취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현실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절망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드는 것이다.

대량 감원과 정리 해고가 기업의 풍조가 된 상황에서 실직자들에게 재취업 문이 좁다는 것은 노동 정책에 큰 허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퇴직자를 상대로 직업을 알선하는 공공 부문으로는 전국 46개 지방 노동사무소 구직 알선 창구와, 시·도 등 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취업 창구, 경총의 고급인력취업정보센터 및 인재은행, 중소기업진흥공단의 직업정보센터 등이 있다. 이들 중 경총이 운영하는 고급인력취업정보센터를 빼고는 대부분 생산직·단순 기능직 소개에 머무른다.

고급인력취업정보센터도 폭주하는 구직 건수에 비해 구인은 턱없이 모자란다. 지난해 6월 문을 연 이곳에는 그동안 사무·관리·전문직 실직자 2천3백여 명이 구직 신청을 했지만 취업에 성공한 사람은 1백28명에 불과하다. 이 센터 전대길 소장은 “퇴직해 이곳을 찾아오는 분들 가운데는 직업을 소개해도 자기 눈높이에 맞지 않다 해서 연결이 안되는 예가 많다. 눈높이를 낮춰 중소기업으로 가서 그 회사를 키워야겠다는 의욕이 아쉽다”라고 말한다.

이같은 여건에서 대다수 실직자가 창업에 눈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일인지도 모른다. KBS 문화사업단이 1월23일부터 나흘 동안 여의도 전시장에서 개최한 창업박람회에 하루 평균 만여 명이 몰린 것은 실업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창업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창업으로 몰리는 퇴직자들의 열기 때문에 점쟁이·역술가 들 또한 때아닌 호황을 맞고 있다. 강남구 역삼동에 사무실을 두고 스포츠 신문에 오늘의 운세를 연재하는 역술인 백운산씨는 “옛날에는 여성 고객 중심이었는데 작년 9월 이후로 40, 50대 실직 남성들이 주고객으로 바뀌었다. 상담자의 70% 정도가 그들인데, 주로 어떤 사업이 성공하겠는가를 문의한다”라고 밝힌다.

그러나 창업은 만만치 않다. 실직자들은 대개 오래 직장 생활을 해온 사람들이어서 경험이 부족한 데다 조금 된다고 알려진 업종은 이미 포화 상태이다. 한동안 인기를 끈 치킨 체인점의 경우 등록된 상표만 13개에 4천여 점포가 개설되었다.

게다가 최근 늘어나는 퇴직자들이 창업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들의 퇴직금을 노리는 전문 사기단까지 등장해 퇴직자를 두번 울리는 일도 빈번하다. 주로 경험 없고 재기가 절박한 이들의 심리를 이용해 부도 어음을 건네거나 유령 회사를 차려 동업을 제의한 뒤 퇴직금만 빼먹고 달아나는 수법, 반짝 업종에서 점포의 권리금만 올려 퇴직자에게 팔아넘기고 빠지는 브로커들 등 각종 신종 사기가 판을 친다.정리 해고는 비용 절감 ‘명약’ 아니다

결국 실업 시대를 맞아 느닷없이 실직한 사람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겪는 이런 현상은 현직자들에게까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실업 불안 심리를 증폭시키는 불씨가 된 셈이다. 현재 실직자들이 사회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정부와 기업이 해고에 앞서 이런 부작용과 불안 심리를 줄이기 위한 장치를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이런 실정에서 경제 회생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실직의 길을 더욱 쉽게 터주는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킴으로써 실업 불안 심리 폭발을 자초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노동연구원 강순희 박사는 “선진국의 경우 노동시장이 유연해 정리 해고로 실직하는 근로자가 전직하기 쉬울 뿐 아니라 회사 경영 사정이 좋아지면 정리해고자를 우선 재채용한다는 단서 조항이 붙어 있어 불안 심리가 크지 않다. 반면 우리나라는 개발 독재 시절부터 정부와 기업이 ‘종업원 가족주의’를 슬로건으로 내놓고 회사에 몸바쳐 충성함으로써 평생 직장을 만들라고 주입해 온 고용 관행을 하루아침에 선진국형으로 바꾼다면서 별다른 충격 완화 장치 없이 노동법 하나에 모든 걸 담으려 하니까 그 충격과 불안 심리가 폭발한 것이다”라고 진단한다.

고용 전문가들은 생산성 향상과 경쟁력 제고를 명분으로 내세워 도입하고자 하는 정리해고 제도가 한국적 노동 상황에서 성공할 것인지에 대해 대체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리 해고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미국 기업들도 정리 해고를 통해 꾀하고자 하는 비용 절감과 경쟁력 강화에 실패한 예가 많아 이제는 이를 기피하는 추세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92년 40%나 인원을 감축한 델타항공이 꼽힌다. 이 회사는 대규모 감원 뒤 남은 직원들의 사기 저하가 서비스 악화로 이어져 경쟁력 확보에 실패했다. 반면 제너럴일렉트릭·포드 등 미국내 초우량 기업들은 경영 악화 시기에 고용 조정을 통한 수량적 유연성(감원)보다는 노사가 협력적 분위기로 위기에 대응하는 기능적 유연성 정책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 남았다. 기능적 유연성 정책이란, 근로자들에게 재교육·훈련을 강화하고, 근로시간을 단축해 임금을 낮추는 대신 고용 안정으로 참여 정신을 북돋아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을 말한다.

대대적인 민심 이반으로 일단 정부·여당이 개정·공포한 노동법이 국회로 되돌아가기는 했지만 이것으로 실업 불안 심리가 잠재워질 것 같지는 않다. 법 개정 유무와 상관 없이 경기는 대량 실업 시대를 향해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실업률 추이만 보아도 올해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해마다 2.0% 안팎에 머무르던 실업률이 지난해 11월 2.3%로 오른 것을 고비로 올 상반기에는 2.5%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지난해 말 42만명이던 실업자가 56만명으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실업 대란 시기를 맞아 이 암흑의 터널을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할 것인지가 국가적 과제로 대두했다. 일단 정부와 기업이 의기 투합해 밀어붙인 첫번째 해법은 민심이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용 전문가들은 정부와 기업주가 근로자와 국민의 마음을 산 뒤 생산성·품질 향상 등에 노조를 책임있게 끌어들임으로써 협력적으로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환부를 도려내기보다는 환자 스스로 재활 의지를 갖도록 해주는 이런 정책은 이번 노동법 파동 과정에서 민심이 주문한 ‘고통 분담’ 자세와도 일맥 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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