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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는 새로운 달력을 쓰고 있었다. 그날은 6월3일이 아니라, 홍콩 회귀(중국에서는 반환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D-28일이었다. 천안문 광장 혁명역사 박물관에 세워진 거대한 전광판은 조국 통일의 역사적 순간을 1초 단위로 카운트다운하고 있었다. 북쪽 만리장성에서부터 남쪽 운남성에까지, 백화점에서 열차 식당칸에까지, 대륙은 이미 불이 당겨진 도화선이었다. 중국은 홍등이었다. 그날 6월30일, 아니 홍콩 회귀 D-1일, 중국 전역에서 인민들은 잠들지 않는다. 폭죽과 불꽃놀이로 밤을 지새우며, 7월1일 새벽 통일의 첫 태양을 맞이할 것이다.

84년 대처 총리와 등소평 당시 주임(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이 합의하면서 홍콩 반환 시계는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중국 지도부의 가장 구체적이고도 상징적인 반환 준비 가운데 하나가 경구(京九) 철로였다. 북경에서 홍콩을 연결하는 총연장 2천5백36km 철로. 지난해 10월 개통된 경구선은 중국 내륙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그야말로 대륙의 척추이다. 78년 이래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였던 등소평의 ‘마지막 작품’이자 제8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91~95년)의 핵심 사업이었다.

95년 11월16일, 착공 3년 만에 완공된 철로 부설을 기념할 때 중국은 홍콩 반환 리허설을 가졌다. 이 날 이붕 총리는 경구 철로가 중국의 21세기를 여는 위대한 프로젝트라면서, 96년 10월 개통될 이 철로가 홍콩과 마카오의 안정과 번영을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경구 철로가 홍콩과 마카오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경구 철로가 관통하는 중국 내륙 지역은 ‘느린 중국’, 즉 산업화가 미치지 않은 낙후한 농촌 지역이었다. 경구 철로는 느린 중국을 상해와 같은 동부 해안이나 홍콩을 중심으로 한 광동 지역처럼 ‘빠른 중국’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경구선은 중국의 미래 열차였다. 취재팀이 경구 철로 위에서 홍콩 반환에 담긴 의미를 읽고자 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홍콩 반환은 중국 자부심의 상징”

6월3일, 홍콩 반환 D-28일 밤, 만리장성을 옮겨다 놓은 듯한 북경 서부역. 단일 역 건물로는 세계 최대이다. 최근 개통된, 홍콩 구룡역까지 가는 제 97 열차는 표를 구하기 어려웠다. 취재팀은 심천행 경구선 제 105 열차에 올랐다. 7호차 6인용 경와(침대차). 빈 자리는 거의 없었고 3층 침대에 올라가 벌써 누워 있는 승객도 보인다. 밤 9시31분 북경 출발, 심천 도착 예정 시간은 5일 아침 9시 30분. 2박3일, 36시간이 걸린다.

이 날 오후 천안문 광장에서 만났던 퇴역 군인 노옥패씨(64)의 말이 떠올랐다. 인민해방군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하던 그는 혁명역사 박물관 전광판 앞에서 “홍콩 반환을 앞두고 중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그의 낯빛에는 굴욕의 식민지 시대, 서세동점의 치욕이었던 조차(租借) 시대를 마감하는 감회가 역력했다. 그 전광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던 학생이며 군인 들, 그리고 중국의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관광객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홍콩 반환은 지난 2월 타계한 등소평 이후 시대, 그러니까 혁명 제3 세대인 강택민 시대의 출발점이었다. 대륙은 그 출발점에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륙 남부에 ‘붉은 중국’을 실어 나를 경구선의 레일은 등소평이 놓았지만, 그 레일 위를 달리는 것은 강택민 시대이다. 북경 서부역은 물론이고 구강역 등 경구선 주요 역 건물의 꼭대기에 세워져 있는 역명은 강택민이 직접 쓴 휘호였다. 그 황금빛 휘호는 21세기를 이끌어갈 혁명 3세대의 자신감으로 보였다.

6월4일. 천안문 사건 8주년을 맞아 홍콩에서 대규모 촛불 시위가 계획된 날이었다. 전날 북경에서도 그랬지만, 경구선 열차 안에서는 천안문 사건을 환기시키는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열차 안내 방송은 홍콩 반환이 앞으로 27일 남았다는 말로 시작되었다. 간밤에 하북성을 거쳐 황하를 건넌 제 105 열차는 산동성을 지나고 있었다.

끝간 데 없는 지평선은 모두가 밀밭이었다. 평균 시속 90km로 달리는 경구선 열차는 느린 중국의 사열을 받고 있는 듯했다. 새벽같이 밀밭에 들어가 추수하는 농부들이며, 양떼나 소를 몰고 나서던 촌부들, 등교하던 소년들은 물론이고, 저수지에서 빨래하는 아낙에 이르기까지 경구선 연변의 인민들은 모두 열차를 향해 ‘부동 자세’를 취했다. 그들의 눈빛은 경구선의 종착역인 홍콩, 즉 중국의 미래를 향하고 있는 듯했다.
취재팀 바로 옆칸에는 마침 심천에 사는 딸의 결혼식에 간다는 조선족 김길수씨(58) 부부가 타고 있었다. 전직 교사인 김씨는 “산동성은 중국에서도 매우 가난한 지역이다. 그러나 경구 철로가 개통되어 크게 발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내륙, 농촌 지역에서 깃발을 올린 중국공산당에게 황하 이북과 양자강 남쪽을 연결하는 교통망은 최대 숙원 사업이었다. 황하와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동서 연결망은 있었지만, 북과 남을 관통하는 척추는 없었다. 경구선은 남북은 물론 기왕의 동서축까지 유기적으로 묶게 된 것이다.

열차 승무원이 홍콩 반환 기념 메달을 팔러 다녔다. 노트북 컴퓨터 크기의 검은색 가방 안에 24K로 도금한 목걸이와 기념 메달들이 들어 있었다. 중국 돈으로 1백60위안, 한국 돈으로 1만6천원. 흑룡강 사투리가 짙은 30대 남자가 기념 메달을 사고 득의만만해 했다.
‘서비스’ 투철한 여승무원들

경구선 레일을 깐 등소평은 결국 홍콩 반환을 보지 못했다. 휠체어에 앉아서라도 홍콩 반환을 지켜보고 싶다던 그는 지난 2월 타계하고 말았다. 중국 연구자들은 홍콩 반환이 등소평 시대의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강택민 시대는 홍콩 반환에 대한 등소평의 염원을 경구선으로 보답했다. 지난 5월23일 홍콩 구룡 역에 처음 도착한 경구선 제 97 열차는 ‘등소평호’였다.

최근 한석홍 박사(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가 펴낸 <강택민 시대의 중국>에 따르면, 만일 중국에 개혁·개방이 없었다면 홍콩 반환은 홍콩 주민들이 거부했을 것이다. 84년 등소평이 영국 대처 총리를 상대로 홍콩 반환 합의를 이끌어낸 배경에는, 모택동 시대의 낡은 제도를 타파하고 시장 경제 메커니즘을 도입해 고도 성장 궤도에 진입한 등소평 시대의 자신감이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박사의 연구서는 49년 중국공산당 정부가 수립되면서 과거 열강이 강요했던 불평등 조약들은 효력을 상실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 이미 홍콩 99년 조차의 의미는 사라져 버렸다고 한박사는 지적했다. 그러나 등소평 시대 이전까지 대륙은 ‘선 대만 해방, 후 홍콩 회귀’ 정책을 고수했다. 홍콩을 사회주의화할 경우, 홍콩은 완전 파산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제105 열차는 중국 공산당의 3대 전적지 가운데 하나인 서주를 통과하고 있었다. 7호차에 고정 배치된 여승무원 2명은 기대 밖으로 친절했다. 수시로 복도를 왕래하며 뜨거운 찻물을 채워 놓았다. 침대로 올라간 승객의 신발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복도를 쓰는 한편, 세수간(세면대) 근처 통로에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도록 했다. 열차가 지저분하면 점수가 깎인다는 것이었다. 승객을 고객으로 인정하는 서비스 정신. 경구선에는 자본주의의 한 주요한 요소가 타고 있었다.

하남성 상구 시. 오동나무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 오동나무들은 마을을 감싼 숲이나 밀밭 가운데 점점이 박혀 있다. 인구 30만인 상구 시는 빠른 중국으로 편입되고 있었다. 연평균 경제 성장률이 12%. 중국 전체가 9%이니 매우 빠른 속도이다. 열차가 안휘성으로 접어들자 안내 방송은 중국 전통 음악으로 바뀌었다. 경극의 원조 격인 <황매극>이라고 한다. 안휘성이 북경 경극의 태생지이기 때문이다. 역 구내에는 홍콩 회귀와 15대(전국인민대회)를 환영한다는 플래카드 옆에 ‘경쟁 능력’이라는 붓글씨도 함께 걸려 있다. 경쟁력. 서비스와 함께 가장 자본주의적인 개념이다.
‘자본’은 상행, 사회주의는 하행

낮 12시30분, 양자강 바로 북쪽에 면한 호북성에 접어들자 터널이 나왔다. 얕은 구릉들이 지평선에 구부리고 있었다. 심천까지 간다는 곡생(28)씨는 장춘 길림 대학 경제학과 대학원생이었다. 등소평의 ‘1국 양제(2체제)’를 높이 평가하는 그는 한국의 경제 발전과 인류의 평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특히 내전이 없어야 한다. 한국도 1국 양제로 가야 할 것이다.” 경구선에서 상상하는 한반도의 1국 양제. 그것은 새삼스럽고 또한 착잡했다. 심천으로 가는 조선족 김씨 부부가 들려준 북한의 식량난 실상이, 추수가 끝나고 이모작 채비를 하고 있는 중국의 드넓은 밀밭 위로 겹치고 있었다.

노자와 조조, 명의 화타의 고향인 부양 시를 지나 경구선은 양자강과 만난다. 호북성과 강서성의 경계. 경구선은, 문화혁명 때문에 20년 이상 걸려 완공된 장강 대교를 건너자마자 구강 시로 접어들었다. 양자강의 수로와 경구 철로가 교차하는 구강은 중국 내륙 최대의 물류 기지를 꿈꾸고 있다. 경구선을 통해 느린 중국에서 빠른 중국으로 탈바꿈하는 가장 대표적인 도시가 구강이었다.

취재팀은 구강에서 내렸다. 4일 오후 4시30분. 구강 역사는 양자강 남북을 연결하는 교량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개찰구에서는 관광객을 호텔로 안내하는 사람들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한 택시 기사는 경구선이 개통된 이후 남쪽(홍콩)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노산과 호수 등 관광지로도 널리 알려진 구강 시는 용틀임을 하는 느린 중국이었다. 구강은 신도시처럼 보였다. 낡은 주택들이 철거되고 새로운 고층 빌딩이 들어서고 있었다. 도심 곳곳에 ‘문명의 사자(使者) 구강시’라는 구호가 쓰여 있었다. 이때의 ‘문명’은 80년대 이전까지 한국 사회를 견인하던 문화의 의미였다. 공중 도덕을 지키는 문화인이 되자고 할 때의 그 문화였다. 근대화 이데올로기의 한 기호였던 그 문화.
6월5일 오후 4시59분, 취재팀은 다시 경구선에 올라 심천으로 향했다. 인민해방군의 탄생지인 남창은 경구선이 통과하는 역 가운데 유일한 성도, 강서성의 수도이다. 오동나무들은 오리 농장으로 바뀌었고, 밀밭도 모내기가 끝난 논으로 변해 있다. 경구선 침대칸에서 다시 하룻밤. 이튿날 아침 광동성 태미 역을 지나자 영어 안내 방송이 나왔다. 통행증과 여권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홍콩과 국경을 맞댄 경제 특구, 자본주의의 실험장인 심천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전 9시30분, 심천 역사를 빠져나오자마자, 광장에서 홍콩이 건너다 보였다. 민둥산 중턱에 영국 깃발을 내걸고 있는 군 초소. 그 초소의 유니언 잭이 펄럭일 날도 25일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영국군 초소가 내려다보고 있는 심천 역 주위로는 고층 빌딩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심천과 홍콩 사이의 국경은 작은 개천이다. 철조망이 쳐져 있는 그 개천 위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걸어서 통과하면 바로 홍콩이다.

홍콩 지역의 첫 역, 그러니까 심천 바로 다음 역인 나호 역에서 출발하는 전철을 타고 구룡 역까지 45분. 반환 25일을 앞둔 홍콩은 밖에서 본 것과 달리 의외로 담담한 분위기였다(66~68쪽 관련 기사 참조). 7월1일 이후의 홍콩. 전문가들의 예측은 ‘홍콩 사망론’과 ‘홍콩 도약론’으로 대별된다.

그러나 북경 당국은 홍콩이 사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홍콩 반환을 계기로 21세기로 가는 추진력을 갖게 된 중국은, 7월1일 이후 경구선의 최종 목적지를 새롭게 설정하고 있다. 그 종착역이란 99년 반환되는 마카오, 그리고 대만이다. 누구보다 중국 지도부가 잘 알고 있겠지만, 홍콩 반환 이후 홍콩의 정치·경제가 어떻게 진전되느냐에 따라 대만 문제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본다. 홍콩의 미래는 홍콩과 중국, 중국과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홍콩에 대한 중국의 약속은 곧 세계에 대한 중국의 약속인 것이다.

경구선은 당분간 북경의 붉은 중국을 싣고 내려가는 홍콩행 하행선만이 강조될 것이다. 그러나 북경행 상행선이 텅 빌 리 만무하다. 자본주의 홍콩 또한 같은 속도로 내륙을 관통하며 천안문에 내릴 것이다. 북경행 경구선에는, 홍콩뿐 아니라 마쓰무라 쓰토무가 <중국 내전>에서 중국 분열의 화약고라고 지목한 광동의 경제권과, 대만의 자본주의까지 동승할 것이다. 강택민 시대에 중국 내부의 변혁은 없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시각에서는, 홍콩 반환을 계기로 중국 대륙이 시장경제 체제로 완전히 편입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홍콩 반환은 21세기 동아시아 질서를 방향짓는 큰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도쿄 대학 동양문화연구소장 하마시타 다케시는 <창작과 비평> 최근호에 기고한 논문에서, 홍콩 반환을 계기로 ‘해양 대국’으로 거듭나게 될 중국과, 탈국가 시대의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일·중·러 4강의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한가운데에서 21세기와 통일 시대를 앞두고 있는 한국이, 홍콩 반환 이후 중국의 미래를 예의 주시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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