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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태 8주년 집회로 ‘마지막 외침’… 주민 무관심 등 내외 장벽에 막혀 앞길 험난

6월4일 저녁 8시30분. 영화 <황비홍> 주제가인 <제호한(祭好漢·pay tribute the good people of china)>이 쩌렁쩌렁 울려퍼진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는 촛불을 밝혀 든 시민 5만5천여 명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대표적인 민주단체인 지련회(支聯會)가 매년 6월4일 주최하는 촛불 시위에 참석한 사람들이다.

‘무망육사(毋忘六四:6·4 천안문 사건을 잊지 말자)’라는 글귀를 새긴 티셔츠를 똑같이 입은 사내아이와 젊은 부부, 곱게 머리를 틀어올린 딸아이를 어깨에 태운 아버지, 연인인 듯 다정히 손을 잡은 남녀.

‘우리는 8년 전 오늘 천안문에서 있었던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날 희생자가 흘린 피와 눈물을 잊지 맙시다’. 진혼곡이 시작되자 모든 이가 촛불을 높이 들고 경건하게 고개를 숙였다. 홍콩에서 허용되는 마지막 시위라는 아쉬움 때문일까? 사회주의 중국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에어컨 없이는 잠시도 못견딜 정도로 무더운 아열대의 밤인데도 이들은 자리를 뜰 줄 몰랐다.

보험중개업을 한다는 한 시민은 “나는 6·4 천안문 사건을 잊지 못해서 이곳에 왔다. 오늘 시위는 아마도 홍콩에서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초대 특별 행정장관 동건화는 벌써 시민들의 자유를 옥죄고 있다”라고 말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나온 한 중년 시민은 “나의 슬픔을 인민과 국가에 전하고 싶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장래 자유에 대한 억압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겠다. 나는 동건화를 믿지 않는다. 그는 음흉한 호랑이와 같다”라고 말했다.

7월1일 역사적인 주권 반환을 눈앞에 둔 홍콩 시민들의 마음은 그리 편치 않은 듯하다. 최근 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주권 반환을‘기쁘게 맞이한다’는 사람은 38%, ‘슬픔으로 맞이한다’는 사람은 28%였다. 나머지 34%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대답했다.홍콩 주민 60% 이상이 반환을 반대하거나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홍콩 사람들이 갖는 불안감은 중·영 간의 국제 공약 사항인‘1국 양제’가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다. 한 국가 내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공존을 설정한 이 제도는 원래 등소평이 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78년 착상한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중국이 오늘날도 법치보다는‘인치(人治)’가 우선이라는 점을 들어 반환 후 홍콩의 위상이 격하하리라고 전망한다. 6월7일 홍콩 도풍산 기독교총림에서 만난 홍콩기독연구소 소장 궉내왕 목사도‘1국 양제’는 법을 무시하는 중국에서는 통하지 않는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홍콩인이 홍콩을 다스린다는 ‘향인치향(香人治香)’에 대한 의문도 있다. 중·영 합의 문서에 이 원칙이 처음 나왔을 때 홍콩 지식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궉내왕 목사는“96 년 12월 초대 특별 행정장관으로 취임한 동건화를 선출위원이 뽑았으나, 선출위원 뒤에는 홍콩반환준비위원회가 있고 준비위원회 뒤에는 북경 정부가 있었다. 결국 북경 정부가 원하는 사람을 뽑았을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홍콩의 지식인들은‘향인치향’은 중국 공산당이 홍콩을 다스린다는 ‘홍인치향 (紅人治香)’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홍인치향은 단지 정치와 행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홍콩의 대중지 <애플 데일리>는‘중국 당국은 홍콩 반환에 때맞추어 국가 안전부·공안부·군 정보 담당자로 구성된 정보기관을 홍콩에 둘 계획이며, 광동성 심천 경제 특구에 임시 총본부를 설치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런 조처는 홍콩을 경찰과 공권력으로 통제하려는 북경 정부의 의도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홍콩의 민주 인사들은 홍콩 민주주의의 장래가 암담하다고 말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하나 둘씩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다. 실례로 중국 국무원 홍콩·마카오 판공실 주임 노평(魯平)은 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주권 반환 이후 홍콩에서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보도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못박은 바 있다. 홍콩의 대표적인 영자 신문인 <사우스차이나 모닝 포스트>도 중국계 자본 밑으로 들어가 표현의 자유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다. 언론 탄압은 이미 훨씬 전부터 행해지고 있다. 홍콩의 중립계 신문으로 전통을 이어온 <明報> 북경 특파원 체포 사건이 그 한 예다. 이 특파원은 중국의 금융 기밀을 훔쳐냈다는 혐의로 93년에 체포되어 97년 1월 하순에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모든 홍콩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장래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 홍콩 시민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6월4일 촛불 시위가 진행되던 바로 그 시각에도 빅토리아 공원 한쪽 구석에서는 시민들이 한가로이 테니스를 즐기고 있었다. 이들은 바로 옆에서 촛불을 든 수만명이 집회를 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에 열중했다.

“홍콩인의 주된 관심은 정치보다 돈”

이와 관련해 홍콩 주재 한국영사관의 한 관계자는“정치에 신경 쓰는 사람은 재벌과 일부 인사뿐이다. 홍콩 사람 대부분은 정치·경제적인 안정을 바란다. 이는 무관심이라기보다는 실용주의·현실주의 경향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국 출신인 홍콩 과기 대학 노승준 교수도 “이곳 시민들의 관심사는 경제이다. 이곳은 국가가 아니라 시(市)이다. 홍콩에는 정치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저금 통장에 돈이 얼마가 있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촛불 시위는 1년에 한 번 있는 의식에 불과하다”라고 지적했다.

홍콩 시민 가운데는 민주 세력과 민주화 운동을 혐오하는 사람도 있다. 6월7일 홍콩 침샤츄이에서 만난 이자기(李子奇·22)씨는 민주 단체들의 시위를 시간 낭비라고 비난했다.
홍콩 시민들의 정치 무관심 경향에 대해 홍콩기독교여성협회 로즈 우 총무는 △군주의 절대 권위에 복종하기를 강요당한 중국의 오랜 정치 문화와 △영국의 식민지 교육 탓이라고 풀이했다.

홍콩을 국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홍콩 사람들은 홍콩이 식민지라고 여겨 왔다. 식민지에서는 돈만 벌면 최고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홍콩은 원래 정치 전통이 없는 도시였다. 홍콩 정청이라는 작은 정부 밑에서 모든 주민은 경제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89년 천안문 사건 당시에 반중 문제를 제기한 적은 있었으나, 정작 지금까지 홍콩인 자신의 정치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같은 맥락에서 전문가들은 역설적으로 정치가 없었다는 사실이야말로 홍콩이 이제까지 번영한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눈여겨 볼 사실이 있다. 홍콩의 중산층 가운데 50만∼60만 명은 외국에 가족을 두고 직장 때문에 홍콩에 와서 일하는 사람이다. 홍콩이 안정되어 있다면 이럴 이유가 없다. 특히 부자들은 여권을 2개씩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만약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정치에 무관심한 홍콩 주민을 대상으로 한 민주화 운동의 장래는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문제는 젊은이들이다. 궉내왕 목사는, 시민 교육을 받은 홍콩의 젊은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홍콩 민주화 운동의 장래가 걸려있다고 말한다.

민주 인사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결국 홍콩의 민주화 세력은 반환 후에 힘이 약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98년 선거 전망도 어둡기만 하다. 홍콩 주민의 정치 무관심과, 체제와 문화가 다른 중국이라는 거대한 메커니즘이 민주 세력의 후퇴를 한 몫 거들 것이다. 그래서 민주화 세력들은 과거 영국 식민 정부와 싸웠듯이, 새로운 체제와 맞서 가혹한 투쟁을 벌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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