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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파·통합파, 지분 서로 나눌 듯… 사나나 구스마오, 대통령 유력
9월5일 일어난 벨로 주교 사무실 방화 사건과 딜리 시내 한복판의 마코다 호텔 방화, 그리고 마코다 호텔 주변의 총격전이 그나마 언론에 확인된 충돌이다.
인도네시아 국영 안타라 통신에 따르면, 9월5일 오후 동 티모르 수도 딜리 시내 마코다 호텔 근처에서 일어난 대규모 유혈 충돌로 현재 확인된 사망자만 25명이다. 하지만 일부 서방 언론은 사망 1백20명, 중상 수백 명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딜리의 종합 병원 정보에 따르면, 사망자 25명은 대부분 총에 맞거나 예리한 칼에 찔렸다. 마코다 호텔 주변에서 일어난 화재는 9월5일 저녁 9시까지도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 기자도 경찰 트럭으로 9월5일 오후 5시께 딜리 시내를 지나면서 마코다 호텔 쪽에서 검은 연기가 엄청나게 솟아 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동 티모르를 이렇게 만든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국내 세력이 아니라 외부 세력이다. 유권자 수가 45만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이 조그만 섬에서 이토록 잔인한 충돌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이 섬이 수백 년 동안 외국 식민 지배를 받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도 철저히 국제 사회의 노리갯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 티모르에 가장 입김이 센 외부 세력은 포르투갈이다. 이 나라는 인도네시아가 침공하기 직전까지 4백50여년 동안 동 티모르를 식민 지배했다. 동 티모르 섬은 포르투갈의 유배지였다. 벨로 주교와 함께 96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호세 라모스 오르타노의 아버지도 정치범으로 동 티모르 섬에 유배된 포르투갈 사람이었다.
포르투갈, 영향력 유지하려 3천만 달러 제공
현재 동 티모르는 국제법상으로는 포르투갈 식민지로 남아 있다. 76년 인도네시아가 무력으로 병합했으나, 유엔이 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75년 동 티모르에서 플랜틴 정부가 독립을 선포한 기간은 이틀밖에 되지 않는다. 국제 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인도네시아가 동 티모르를 침략한 것은 독립국 동 티모르를 침략한 것이 아니라 포르투갈 식민지를 강제로 합병한 것이라는 뜻이다.
동 티모르와 비슷한 경우는 스페인 식민지였던 서(西) 사하라가 있다. 서 사하라도 동 티모르와 비슷한 시기에 스페인이 식민 정책을 포기하는 바람에 독립했다. 그러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자마자 인근 모로코가 침공해 서 사하라는 모로코 식민지로 전락했다.
만약 동 티모르가 유엔의 일정대로 독립해서 국가를 잘 꾸려 간다면, 서유럽 최빈국 포르투갈은 유럽연합(EU)에서 그만큼 정치적 위상을 높일 수 있다. 또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발판을 만들 수도 있다. 동 티모르의 독립운동을 주도해온 엘리트들은 대부분 포르투갈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친포르투갈 인사이다. 포르투갈 정부가 이번에 인공위성 송출 장비까지 갖춘 언론 취재진을 대거 파견하고, 향후 3년간 동 티모르에 3천만 달러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데는 이런 계산이 깔려 있다.
포르투갈 못지 않게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호주이다. 지리적으로 호주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인도네시아이다. 또 호주는 동 티모르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난민이 대량으로 호주에 유입되기 때문에 이곳의 불안정을 원하지 않는다. 동 티모르는 2차 세계대전 때 호주군과 함께 피를 흘리며 일본군과 싸운 혈맹이다. 호주는 인도네시아와의 이같은 관계를 생각해서, 75년 이후 인도네시아가 이곳에서 대규모 학살을 저질렀으나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와 다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 76년께 유엔이 호주 라디오를 통해서 동 티모르 독립을 위해서 싸우는 무장 게릴라 팔렌틸과 통신을 주고 받을 계획을 세웠으나 호주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동 티모르 전문가인 호주의 허브 페이트 교수는 이를 호주의 더러운 배신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번 투표에도 동티모르민족저항평의회(CNRT)가 라디오 방송국을 호주에 세워서 투표 홍보를 하려 했으나 호주 정부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독립운동 번지면 인도네시아 분열될 위험
최근 동 티모르 문제가 국제 사회의 이슈로 떠오르고, 대세가 독립 쪽으로 흐르자 호주는 다시 동 티모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현재 호주는 동 티모르가 독립하면 개발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겠다고 대외에 공표했다. 또 동 티모르에서 현재 굴러다니는 유엔 차량 대부분이 랜드로바 사가 만든 사륜 구동 자동차인데, 이 차 구입비도 호주가 댄 것으로 알려졌다. 호주가 태도를 바꾼 가장 큰 이유는 동 티모르와 호주 사이 바다에 있는 유전 때문이다. 이 유전은 현재 호주 석유회사들이 개발하고 있다. 또 동 티모르를 발판으로 아시아권에 영향력을 넓히려는 속셈도 있다.
인도네시아는 당연히 동 티모르의 독립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투표를 통해서 독립이 선포되었지만, 인도네시아 국회인 국민협의회(MPR)가 이를 의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인정할 수 없다는 분위기이다. 인도네시아로서는 동 티모르의 독립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동 티모르가 독립하면 현재 분리 독립 운동이 일고 있는 아체 주와 이라안자야 사태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과거 소련이 무너진 것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이 독립한 것이 도화선이었다. 인도네시아 지식인들은 만약 이번 기회에 아체와 이라안자야가 떨어져 나간다면, 인도네시아는 국가 존립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발리·자바·보르네오 같은 섬들이 모두 이해 관계가 달라 자칫하면 나라가 쪼개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유엔은 동 티모르 문제를 명예를 회복하는 일대 전기로 삼고 있다. 코소보 사태에서 유엔이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인도네시아와 포르투갈이 동 티모르의 장래를 결정하는 회담을 끝낸 것이 지난 5월인데, 2개월도 안되는 빠른 시간 안에 투표 감시단을 파견할 수 있었던 데는 유엔의 조바심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코피 아난 사무총장과 동 티모르의 해외 지도자 호세 라모스 호르타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코피 아난과 호세 라모스 호르타는 뉴욕에서 한 아파트에 1년 넘게 같이 살았기 때문에 서로 잘 아는 사이이다.
2~3년 동안 내전 계속될 가능성
그렇다면 내전이 계속되더라도 독립 쪽으로 결정이 났기 때문에 동 티모르는 어쨌든 정부를 구성할 것이다. 독립 정부의 초대 대통령감으로는 당연히 현재 자카르타에 수감된 사나나 구스마오가 꼽힌다. 그는 9월 중순 석방되어 귀국할 예정이다. 사나나는 동 티모르 정부 구성과 관련해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남아공 모델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새 정부를 꾸리면서 인종분리주의자를 무조건 배제하지 않고,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적당한 비율로 지분을 나누어 갖는 형식을 취했다. 사나나의 구상은 동 티모르에서 독립파와 인도네시아 통합파가 일정한 지분으로 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내전을 벌이고 있는 반독립파 민병대도 물밑으로는 독립 정부 구성 준비 팀과 협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런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될지는 미지수이다. 남아공은 그나마 영국식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동 티모르는 아직까지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국가이다. 정부를 구성할 맨파워도 절대 부족하다. 더구나 동 티모르의 망명 인사들은, 독립되지도 않았는데 독립한 뒤 상황을 놓고 자리 다툼을 벌이고 있다.
무엇보다 현재 무장 폭동을 일으키고 있는 반독립파 민병대를 제압하는 것이 새 정부가 풀어야 할 가장 큰 문제이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부인하고 있지만 이들 민병대원은 인도네시아 정규군에게 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문제는 동 티모르 서쪽 5개 지역 80% 이상이 민병대에 장악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도네시아군을 상대로 무장 독립 투쟁을 벌였던 독립파의 무장 조직 팔렌틸은 중앙 지도부가 통제할 수 있다. 그런데 반독립파 민병대는 각 지역으로 나뉘어 있어 지도부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독립운동 지도자인 사나나 구스마오가 귀국해서 민병대 최고 지도부와 협상하더라도 지역 민병대들과 따로 협상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처럼 동 티모르는 주민의 투표로 독립을 선택했지만 당분간은 심각한 내전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적어도 1년에서 2년 정도 이런 상황이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