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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한인 이리지야씨의 ‘비극’
이리지야씨의 올해 나이는 예순. 그 나이는 원동(시베리아 지역 하바로프스크 부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고려인’(예전부터 옛 소련 동포들은 스스로를 조선인이나 한국인이 아닌 고려인이라 불러 왔다)의 역사와 일치한다. 1937년. 60년 전 그 해는 고려인들의 운명을 뒤바꾼 해였다. 원동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18만 고려인은‘적성국 일본과 내통해 간첩 활동을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스탈린에 의해 하루아침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이씨의 삶은 바로 그 해에 시작되었다.
산모는 갓난아기를 기차 밖으로 던지려 했다
9월9일 밤 11시30분에 시작되어 그 해 연말에 마무리된 37년의 참상. 이것을 겪은 고려인들의 이야기는 세부 사항만 조금씩 다를 뿐 모두가 더할 나위 없는 비극이었다. 그중에서도 이리지야씨의 삶이 남다른 이유는, 그가 고려인들을 짐승이나 짐짝 취급하며 중앙아시아로 실어 나른 바로 그 화물 열차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널빤지로 바람을 막고, 짚으로 바닥을 깐 화물 열차는 화차마다 네 가족씩 태우고 달렸다. 열차에 남아 있는 가축의 똥 냄새와 살을 에는 시베리아의 바람, 그리고 밤낮을 구별하기 힘든 어둠 속에서 탯줄을 끊은 산모는, 갓난아기를 기차 밖으로 던져버리려 했다. 젖을 달라고 밤낮으로 울어대는 핏덩이는 산모에게 짐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기차 속은, 병과 굶주림으로 죽은 노인과 영아의 시신을 바깥으로 던져야 했던 아수라장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스물여섯 살 젊은 산모 김안나는 원동에서 남편과 생이별한 채 친정 어머니와 일곱 살, 여섯 살 남매를 데리고 어딘지도 모르는 땅으로 끌려가던 참이었다. 남편은 이씨 가족이 기차에 오르기 며칠 전 한밤중에 들이닥친 내무인민위원부 기관원들에게 끌려가 생사조차 모르던 형편이었다(55쪽 상자 기사 참조).
외동딸을 따라와 핏덩이를 받았던 친정 어머니가 외손녀를 부둥켜안았고, 열차 속에서 한 달을 함께 고생한 이웃들이 음식을 조금씩 나누어 주어 이씨는 겨우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열차에 오르기 3~4일 전에야 이주하라고 통보 받은 고려인들은 많아야 1주일치 식량만을 준비했던 터였다.
이씨는 생일상을 해마다 10월27일에 받는다. 그 날은 이씨가 태어난 날이 아니라, 그의 가족이 우즈베크공화국 타슈켄트 주 세르니치르치크 구역 세베르늬마야크 콜호즈(集産 농장)에 도착한 날이다. 가족 가운데 이씨가 태어난 날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 달을 달려온 뒤 물 설고 낯선 중앙아시아에 내팽개쳐진 처지에, 갓난아기의 생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지극히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우즈베크공화국 수도인 타슈켄트 시에서 동남쪽으로 40㎞ 떨어져 있는 이 지역에는 고려인 3백여 세대가 떨어뜨려졌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늪지와 갈대밭뿐이었던 이곳에서 그나마 위안거리를 하나 찾을 수 있었다면, 원동에서 한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은 채 함께 들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마을 이름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었다. 연해주 올가 구역에서 사용하던‘세베르늬마야크’를 이곳에서 그대로 사용했다. 세베르늬마야크는‘북극 등대’라는 러시아 말이다. 늪지대 갈대밭을 옥토로 일군 이 마을 고려인 농부들은, 이곳에 끌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었다. 스탈린이 자행한 강제 이주는 ‘연해주의 어부’를‘중앙아시아의 농부’로 하루아침에 바꾸어버린 것이다.
입고 신을 것 없어 학교 못 가
“어릴 때는 옷도 못 입고 신발도 못 신고, 무엇보다 배가 너무너무 고팠다. 그런데도 내가 살아 남았다는 사실이 기적이다 ”라고 이씨는 말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중에는 35~37년생이 거의 없다. 당시는 학질·이질·홍역 같은 병이 만연해 노인과 어린이 절반 가량이 사망하는 등 죽음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41년에 재혼한 이씨의 어머니는 양아버지와 4남매를 두었으나, 그 중 둘을 잃었다.
이씨는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면 할머니와 어머니가‘벼밭’과 목화밭에서 밤낮을 잊은 채 일하시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했다.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서는 가족 모두 농사일에 달려들어야 했다. 아홉 살에 학교에 입학한 이씨는, 가을걷이 때는 학교 대신 목화밭으로 등교했다. 목화밭 생활은 겨울까지 이어졌다. 말을 탄 소년이 앞에서 눈을 치우면, 어린 소녀들이 뒤를 따르며 목화를 뜯곤 했다.
추위와 배고픔보다 어린 이씨를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던 것은, 입고 신을 것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했던 일이다. “어머니가 ‘오늘은 학교에 가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그냥 집에 있어야 했다. 슬프기는 했지만 어머니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장을 잃은 채 이주해온 이씨의 가족이 그마나 큰 탈 없이 자리를 잡고, 무엇보다 이씨 3남매가 모두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원동에서 아버지와 가깝게 지냈던 동네 어른들 덕분이었다. 그들은 이씨 가족을 자기 식구처럼 돌보아 주었고, 그 자식들에게는‘똑똑하고 훌륭한 분이었다’며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지금도 논두렁에 드문드문 남아 있는 갈대는 어른 손가락만큼 굵다. 이주한 이듬해부터 고려인들이 이 갈대밭 위에 집을 짓고 논밭을 일구어 벼와 목화를 심으면서 생활의 꼴을 갖추어 나가자 러시아·우즈베크·타타르·카자흐 등 이 지역에 살던 다른 민족들이 이 마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 스탈린의 학정에 시달리던 다른 민족들은 고려인들에게 다정하고 따뜻한 이웃이 되어 주었다.
한국의 초·중·고를 합친 형태의 학교 교과 과정에는 고려말과 글을 배우는 시간이 1주일에 2시간씩 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어를 먼저 익히고 러시아 말로 공부해야 했던 학생들에게 고려글 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게다가 고려글 교과서는 물론 선생님마저 없었다. 이씨는 지금 한글을 읽고 쓰기는 어려워하지만, 우리 말은 짙은 함경도 사투리로 별 어려움 없이 구사한다. 어릴 적부터 학교를 제외한 모든 생활 공간에서 고려말로 의사를 소통해 왔기 때문이다.
손주들 손잡고 고국 나들이하기가 소원
56년 열아홉 살에 학교를 졸업한 이씨는, 그 이듬해 자기보다 네 살 많은 남편을 만났다. 형부 소개로 언니 집에서 트랙터 기사인 최바사련씨와 선본 뒤 연애 기간도 갖지 못한 채 한 달 만에 타슈켄트 시의 한 식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아파서 늘 누워 계시던 양아버지가 빨리 시집가라고 하시는 바람에 결혼을 서둘렀다. 고려인들에게 아버지 말씀은 법이었다.”
남편이 살던 세르겔리 촌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한 이씨 부부는, 1년 만에 친정 마을인‘북극 등대’로 되돌아왔다.‘탁월한 지도력으로 콜호즈를 이끈 고려인 회장님들 덕분에’이 마을이 다른 지역에 비해 형편이 썩 좋았던 데다, 당시 회장이 마을 공동 목욕탕으로 쓰던 큰 집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원동에서 이씨 아버지에게 큰 은혜를 입었던 이안톤바실리치 회장이, 바로 그 딸에게 은혜를 갚은 것이다. 이씨는 그 집에서 30년 동안 살아 왔다.
콜호즈 소년단에서 어린이 지도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던 이씨는, 92년 55세로 정년 퇴임할 때까지 유치원 보모로 일해 왔다. 그러는 사이 3형제를 낳고 키웠다. 자식들은 지금 모두 결혼해 따로 나가 산다. 장남 최라지크씨(39)는 타슈켄트에서 트럭 운전 기사로 일하고, 차남 최게나지씨(35)는 러시아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으며, 3남 최알렉산드르씨(31)는 타슈켄트에서 사업을 한다. 37년 중앙아시아행 기차 속에서 꺼질 뻔했던 그 생명에서 아들 셋과 손자 아홉이 태어났다.
남편도 93년에 정년 퇴임해 부부는 연금을 받아 생활한다. 남편은 2천1백슘(약 3만1천원), 이씨는 1천7백슘(약 2만5천원)을 달마다 받고 있는데, 아들들이 보내오는 생활비를 합하면 두 사람이 사는 데 별로 부족하지 않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이라면 대부분 그렇듯이, 잠시도 몸을 가만 두지 못하는 부지런함 덕분에 이씨의 집은 작은 농장이나 다름없다. 배추 상추 파 감자 콩 같은 채소는 물론, 닭과 거위 수백 마리와 돼지가 자라고, 사과·복숭아·버찌 같은 과일도 풍성하게 열린다. 이 부부는 부모의 생일과 설·한식·추석 때 술과 고기를 들고 찾아오는 자식들과, 방학을 할머니집에서 보내는 손자들을 기다리는 재미로 산다고 말했다.
타슈켄트의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행 열차 안에서 태어나 생명을 유지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외부인이 보기에, 그보다 더 기적 같은 일은, 고국과 완전히 차단된 채 수십 년을 살아 왔으나 생활 형태와 훈훈한 마음 씀씀이가 한국의 농촌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서울에 가져가서 먹으라며 상추를 뜯고, 비닐 봉지에 시래기를 가득 담아 기자에게 안겨준 그는 “굶어 죽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면서요?”라며 북한 소식을 안타깝게 물어보기도 했다.
이씨는 해마다 10월27일이면 자식·조카 들과 조촐한 생일상을 차렸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언제나 1937년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생일을 언제나 슬프게 맞았다는 이씨는, 오는 10월 환갑을 맞는다. 이씨의 소원은, 죽기 전에 어린 손주들 손을 잡고 고국 나들이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