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회담 대하는 태도 180도 뒤바뀐 윤석열과 이재명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고 722일 만에야 성사된 여야 영수회담이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그동안 윤석열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을 요구해 왔지만, 이 대표를 ‘피의자’로 보는 윤 대통령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랬던 윤 대통령의 태도가 달라져 이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한 것은 여당이 겪은 최악의 총선 참패 때문이다. 민주당,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새로운미래, 진보당까지 합하면 ‘반윤 정당’의 의석수가 192석에 달하는 환경에서 야당과의 대화가 절박하게 필요하게 된 것은 윤 대통령이다.
이럴 줄 몰랐을까. 소수파 정권이라는 현실도 잊고 불통의 통치만 고집하다가 이제 수렁에 빠지고 나니까 야당과의 대화에 나서는 윤 대통령의 모습이 딱하기는 하다. 그래도 어떤 상황에서든 여야가 대화를 하는 것은 필요하다. 윤석열 정부와 민주당 가운데 어느 쪽도 악마도 아니고, 그렇다고 천사도 아니다. 서로가 잘하는 것도 있고 비판받을 것도 있는, 장점과 흠결을 저마다 갖고 있는 정치 세력들이다. 그러니 서로가 만나서 소통하면서 상대의 입장을 일단 제대로 들어보는 것은 정치를 하는 이상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윤석열-이재명의 영수회담이 열린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대화 분위기는 냉랭했고 회담의 성과는 눈에 띄지 않는다. 이 대표는 모두발언에서 A4용지 10장 분량의 원고를 약 15분간 읽어 내려갔다. 취재진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들을 다 하기 위해 마이크를 독차지한 것이다. 이 대표는 “채 해병 특검법,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면 좋겠다”는 말로 김건희 여사 특검법 수용을 압박하기도 했다.
‘피의자’ 낙인 벗어난 이재명
이어진 이 대표의 말들은 신랄하고 깨알 같았다. “대한민국에 대해서 스웨덴 연구기관의 독재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한다” “지난 2년은 정치는 실종되고 지배와 통치만 있었다는 그런 평가가 많다” “행정권력으로 국회와 야당을 혹여라도 굴복시키려고 하면 성공적인 국정은 쉽지 않을 것이다” 등등. 면전에서 그런 독설을 듣는 윤 대통령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된다. 윤 대통령도 자신에 대한 비판은 누구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윤 대통령이 모두발언을 생략했던 것도 그런 분위기에서 자신이 할 말이 없음을 드러낸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 대표의 요구 사항들은 비공개 회담에서도 대부분 거론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영수회담에 대한 윤 대통령과 이 대표의 태도는 과거와는 정반대가 되었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과 이 대표의 영수회담을 앞으로도 이어나가기를 희망하며 독대 가능성도 거론했다.
그러나 회담 다음 날 민주당의 분위기는 다시 차가워졌다. 민주당은 후속 회담 여부에 대해 답을 주지 않고 앞으로 윤 대통령의 태도 변화를 지켜보고 판단하겠다는 입장이다. 특히 5월 본회의를 통과한 상병 특검법에 대해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가를 지켜보고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민주당이 영수회담을 간청하다시피 하고, 윤 대통령은 일언반구 반응도 없었던 서로의 분위기가 180도 완벽하게 달라진 것이다. 돌고 도는 정치무상의 광경이다.
대화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조심스러울 텐데도 민주당이 후속 영수회담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자칫 윤 대통령의 소통 이미지만 만들어주는 들러리 역할을 할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번 영수회담에서 민주당이 얻어낸 의미 있는 성과는 없었다. 의대 증원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인되고, 앞으로도 영수회담을 계속해 나가자는 정도가 합의의 전부였다.
그래서 합의문조차 발표되지 않았던 회담이다. 그래도 이재명 대표는 ‘피의자’ 낙인에서 벗어나 윤 대통령이 협조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로 격상되는 가장 큰 성과를 얻었다. 이는 앞으로 있게 될 이 대표의 ‘재판 리스크’에도 유리한 분위기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요구 사항에서 얻어낸 것은 없지만, 이번 회담의 승자가 이재명 대표인 이유다.
영수회담 결실은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몫
사실 이 대표가 구체적인 요구를 워낙 많이 거론했기에 윤 대통령이 어디까지 수용해 합의를 도출했어야 했느냐 하는 것은 매우 논쟁적인 문제다.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입장은 수사 외압 의혹이 군의 명예와 사기와 직결된 사안이라는 점에서 보수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진상을 규명해야 할 일이다. 혹시라도 대통령실이 관련된 사실이 나온다고 해도, 읍참마속이라도 하고 가야 비로소 매듭지어질 수 있다. 이번 회담에서 윤 대통령이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통 큰 결단을 내렸다면 그도 달라졌다는 긍정적 여론의 평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재명 대표가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고 회담에서도 요구한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은 투입되는 재정 대비 효과에 대한 논쟁이 여전한 상태다. 그래서 야당의 일방적 요구를 정부가 덜컥 수용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결국 이 대표가 제시했던 많은 요구는 통째로 수용하거나 거부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개별적으로)’로 의견 조율을 모색해야 할 것들이다.
여야의 극한적 대치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협상을 통한 주고받기가 필요한 것이 정치다. 과거의 정치는 실제로 그래 왔다. 그런데 이제 야당은 의석수의 힘을 앞세워 모든 사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며 정권의 항복을 요구하고, 반대로 정권은 야당이 주장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전부 아니면 전무’의 정치만이 존재한다. 여야의 대화 복원이 절실하고 영수회담은 그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해야 했다. 결국 윤 대통령과 이 대표 간 영수회담의 결실을 맺게 하는 것은 국민의힘과 민주당이라는 정당의 몫이다.
그러나 막상 회담 이후 양당의 분위기를 보면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어렵게 성사된 영수회담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여야 간 협상과 대화가 이어져야 할 일이다. 차를 타고 30분만 가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마주 보며 대화 한번 한 적이 없었던 그간의 현실은 정치의 부재를 의미한다. 여러 한계가 있더라도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극한 대결 정치의 극복을 위해 계속 만나야 할 책임이 있다. 이태원 특별법이 영수회담 이후 여야 합의로 통과된 결실을 계속 이어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