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마의 본질은 ‘인마일체’…말에 무리한 압박 주면 ‘실권’ 판단
말을 ‘유능한 기계’ 아닌 팀워크 맞는 ‘파트너’로 키우는 것
어느 승마경기 영상에서 본 장면이다. 한 선수가 말과 함께 경기를 시작했는데 말이 장애물을 하나 거부를 하고 말았다. 몇 걸음을 더 가던 선수는 한 손을 들어 기권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현장에 있던 관중들이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그 선수가 경기를 포기한 이유는 단 하나, 말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말이 장애물을 거부하자 선수는 말 건강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걸 간파하고, 무리해서 경기를 계속 하는 대신 말의 건강을 위해 기꺼이 기권을 선택했다. 관중들은 우승보다 말을 중요하게 여기는 선수의 마음가짐에 박수를 보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승마의 스포츠맨십이다.
말과 기수 사이 교감, 승마경기를 하는 이유
승마경기에서는 승마의 본질이라고들 하는 ‘인마(人馬)일체’, ‘말과 기수 사이의 교감’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감동적인 장면들이 많다. 1930~50년대에 활동한 덴마크의 리즈 하텔(Lis Hartel) 선수는 남성과 군인 중심이던 당시 승마계에서 올림픽 메달을 따낸 최초의 여성이자 민간인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무릎 아래로는 마비 상태인데다 손과 팔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소아마비 환자였다는 것이다. 말에 오르는 일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그녀는 두개의 올림픽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덴마크 마장마술 챔피언 자리에도 수차례 올랐다. 그 곁에는 그녀의 애마 ‘쥬빌리(Jubilee)’가 항상 함께였다.
지난 6월에 열린 영국의 크로스컨트리 대회(*다양한 지형지물을 포함하는 장거리 장애물 경기)에 참가했던 해리엇 비딕(Harriet Biddick) 선수는 경기 도중 말의 굴레가 벗겨지고 말았다. 말이 머리에 쓰고 있는 굴레는 재갈과 고삐 등이 연결돼 있어 말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게 하는 장비다. 특히나 말이 흥분상태가 되기 쉬운 장애물 경기에서 굴레가 없다는 것은 안전사고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딕과 그녀의 말 ‘실버 리프트(Silver Life)’는 장애물 코스를 3개나 더 이어나갔다. 굴레 없이 경기를 이어나간 이 몇 초간의 시간은 말과 기수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돼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명장면으로 거듭 회자되고 있다.
한편, 승마경기 도중 말 입이나 옆구리에서 피가 나는 경우에는 명백하게 실권 판정을 받는다. 이 부위는 재갈과 박차라는, 상대적으로 말에게 가장 민감한 자극을 주는 장비가 닿는 곳들이다. 말에게 불필요한 고통이나 압박을 주지 않고 말과 사람 모두 편안한 상태로 기승하는 것이 정석이나, 어떤 이유에서건 그게 잘 되지 않을 때는 재갈이나 박차로 압력을 가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하지만 국제승마연맹은 이런 상황이 과도하게 발생하는 기수에 대해 ‘경기에 출전할 권리가 없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승마경기에서 겨루는 것은 말이 사람의 명령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가가 아니라, 말과 기수가 얼마나 팀워크를 잘 이루어서 주어진 과제를 해내는가다. 때문에 어떤 말과 어떤 선수의 조합인지가 대회 출전자격을 결정짓는 기준이 된다. 무릎 아래로는 영구적으로 감각을 잃은 소아마비 환자가 올림픽 메달을 딸 수 있고, 1등 수상자보다 재갈과 굴레 없이 장애물을 넘은 사례가 더 주목을 받으며, 무리한 장비 사용을 하는 선수에게는 실권 판정을 내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승보다 중요한 건 ‘함께’를 느끼는 것
말과 호흡을 맞춰 장애물을 뛰어넘거나 특정한 동작을 수행하는 것은 보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오로지 말과의 파트너십이 긴밀하게 만들어져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선수들이라면 모두 다 안다. 경주 퇴역마들을 다시 승용마로 훈련시키는 것, 장애물이나 고급 마장마술 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말을 유능한 기계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과 팀워크를 맞출 수 있는 파트너로 성장시키는 과정이 돼야 하는 것이다.
지난 9월 로마에서 열린 장애물 그랑프리에서 우승한 스웨덴의 헨리크 폰 에커만(Henrik von Eckermann) 선수가 남긴 소감에서 승마경기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새삼 깨달 수 있다.
“물론, 우승은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말과 함께 온전히 함께 있음을 느끼는 것, 우리가 팀을 이루고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