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받은 영화 원작 연극의 한국 초연 주목…단일 세트가 주는 완성도로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
올봄에 개최됐던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트로피는 《블랙 스완》의 감독으로 유명한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신작 《더 웨일》의 브렌든 프레이저가 받았다. 진지하고 현학적인 작품 세계로 잘 알려진 애러노프스키 감독은 희곡 작가 사무엘 D 헌터가 쓴 동명의 원작 연극을 2012년 뉴욕 플레이라잇 호라이즌스 극장에서 처음 관람했다. 이 작품은 2013년 뉴욕 오프-오프 브로드웨이의 최고 시상식 중 하나인 ‘루실 로텔 어워즈’에서 최우수 연극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감독은 세월이 흘러 주인공 역을 맡게 된 영화배우 브렌든 프레이저와 운명적으로 조우하면서 성공적인 영화 각색의 길을 걸었다.
작품 제목 ‘고래’의 의미
그가 연기한 역할은 주인공 ‘찰리’다. 미국 아이다호주 북부 마을에 사는 이 남자는 체중이 270kg이라는 초고도 비만의 몸을 가지고 있어 평상시에도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 없다. 작품의 제목 ‘고래’는 스스로 컨트롤할 수도 없는 거대한 몸을 가지고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비하하는 의미도 갖고 있다. 혼자 살고 있는 찰리는 자신의 몸무게로 인해 푹 꺼진 소파에 앉아 스스로 일어날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침대에 누울 수도 없는 참으로 저주받은 인생을 살고 있다. 그는 평소에 보행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주식인 고칼로리 음식을 찾아 먹기 위해 최소한으로만 움직인다.
이 작품의 원작 연극이 지난달 동숭아트센터를 리모델링한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한국 초연을 가졌다. 연출은 《그을린 사랑》 《와이프》 《녹천에는 똥이 많다》 등으로 다수의 상을 받은 신유청 연출가가 맡았다. 비록 공연 기간은 짧았지만 리모델링 후 관람이 한결 편안해진 객석과 단일 세트의 세련된 디자인이 주는 완성도 높은 프로덕션으로 기억될 만한 작품이었다.
영화와 달리 연극 무대는 장소 변화가 잦으면 무대장치 전환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흐름이 끊길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연극들은 오로지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만 드라마가 진행된다. 이 경우 그 공간에 사람들이 등장과 퇴장을 해줘야만 장면 전환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1960년대 말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연극 《보이즈 인 더 밴드》의 배경 역시 주인공 마이클의 아파트 안으로, 생일파티에 여러 명의 게이 친구가 차례로 방문하며 여러 소동이 벌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연극 《더 웨일》은 애초에 주인공이 집 밖으로 나가기도 어려운 현실적인 설정까지 감안해 장소 변화가 없는 단일 세트 구조로 진행됐다.
막이 열리면 이 남자는 게이 포르노를 보면서 자위행위를 하고 있다. 찰리 역의 백석광 배우는 20kg이 넘는 의상과 특수분장을 하고 연기한다. 관객들은 같은 공간에서 그 몸과 처음 조우하면서 한 번 놀라고 첫 장면부터 쇼킹한 그의 행위에 두 번 놀란다. 게다가 찰리가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모습은 마치 사람이 아니라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 고래 같기에 즐거운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실감 나게 의도된 것이다. 사실 찰리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먹고 있다. 초고도 비만으로 인해 내부 장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서 울혈성 심부전을 앓고 있는 몸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된다. 그는 대학 온라인 줌 강의를 맡아 작문을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보면 충격을 받을 학생들을 위해 자신을 향한 카메라는 꺼놓는다. 자신을 향한 시선이 혐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소극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그는 오래전에 결혼해 젊은 아내(정수영)와 갓난 딸이 있었지만 동성애자라는 내면의 성 정체성을 좇아 가족을 버리고 남자친구 앨런을 선택했다. 하지만 앨런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 집안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게 된다. 찰리는 앨런의 죽음에 자책하며 완전히 삶의 의욕을 잃고 포식에 빠져 포기의 상징이 돼버린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통원 치료도 거부하면서 건강 악화로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도 피하지 않았다. 마지막 바람으로 일찍이 소원해진 딸을 다시 만나 아빠로서 뭔가 하나만이라도 잘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다행인 것은 찰리가 고독사 위험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의 몸은 바깥세상과 단절돼 있지만 그렇다고 고독하지는 않다. 그의 곁에 아내와 딸은 없지만 찰리의 집을 수시로 방문해 건강을 실제로 챙겨주는 리즈(전성민)는 앨런의 여동생이다. 리즈는 죽은 오빠의 연인이었던 찰리를 병마로부터 회복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혐오에 대한 성찰
그리고 그의 집에 어느덧 반항기 청소년으로 훌쩍 커버린 딸 엘리(탁민지)가 헤어진 부모 때문에 억지로 방문한다. 엘리는 어릴 때 자신을 버린 아빠를 증오하며 현재 괴물 같은 모습을 조롱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찰리는 그런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애쓰는 아버지다. 그리고 생뚱맞게 근처에서 포교활동을 하는 젊은 모르몬교 전도사 토마스(김민호)까지 등장하는데, 대화의 주제는 종교를 넘어 미성숙한 인간의 삶에 대한 존재론으로까지 확장하게 된다.
이 작품 안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은 심연에 깔린 주제를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는 병마로 인해 고통을 느낄 때마다 딸이 8학년 때 쓴 모비딕에 관한 에세이를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곤 한다. 이 소설에서 고래잡이 선장 에이헙은 모비딕을 잡겠다는 무모한 신념으로 가족을 버리고 망망대해로 떠났다. 어린 엘리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을 이 소설을 통해 보았고, 8세 나이에 최고의 소설이라는 감상평을 남길 수 있었다. 이는 거대한 고래가 일으키는 물보라처럼 흩어져 있던 가족에게 화합의 실마리가 돼준다.
《더 웨일》은 외모에서 온 차별, 성 정체성 문제 혹은 타 종교에 대한 성숙한 존중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는 작품이다. 가족 간의 화합을 다루고 있지만 가족을 넘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혐오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게 만드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