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자 공원국의 유목문명기행》ㅣ공원국 지음ㅣ위즈덤하우스 펴냄ㅣ296쪽ㅣ16,000원
서기전 514년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의 동업자인 유목민 스키타이를 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넜다. 정주민은 느린 데다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하나씩 순서대로 제압할 수 있지만 유목민은 움직이고 또 빠르다. 더구나 스키타이는 적수의 해골을 다듬어 술잔을 만들었을 만큼 호전적이다.
다리우스 1세는 다뉴브 강을 건너 스키타이 땅에 들어섰지만 적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스키타이는 초지를 황폐화하고 우물을 메운 다음 처자와 모든 짐승을 이끌고 사라졌다. 초원에서 지치고 보급이 끊긴 다리우스 1세는 사자를 보내 ‘항복하든지 싸우든지 하라’고 했지만 돌아온 스키타이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는 두려워서 달아나는 것이 아니다. 평화로울 때도 이렇게 행동한다. 우리는 잃을 도시도, 곡식을 심을 땅도 없다. 싸우고 싶으면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까지 와서 파헤쳐보라. 그때 우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게 될 것이다.”
다리우스 1세는 적을 찾아 황야를 헤매다 결국 포기하고 퇴각했지만 이때 따라붙은 스키타이의 게릴라 전술에 엄청난 피해를 봐야 했다. 그 후 페르시아가 또다시 북방 초원으로 원정을 떠났다는 기록은 없다. 두 집단은 사이에 낀 강, 바다, 산맥을 장벽 삼아 각자 세력을 유지했다.
반면 거대한 자연장벽이 없는 동방에서는 중국 대륙 정주민과 북방 초원 유목민의 치열한 대결이 전개됐다. 그로 인해 부족 단위 세력을 유지하던 유목민들이 제국을 향해 응집력을 발휘하면서 흉노, 월지 등 유목민 통일 국가가 등장했다. 진(秦) 제국의 공격으로 흉노가 서쪽으로 밀리면 그 바람에 훈족과 고트족이 서쪽으로 밀리고, 게르만족이 로마로 대이동을 하는 식으로 ‘정복당하기 어려운 땅’에 살던 유목민은 세계사 흐름에 굵직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물론 한반도 역시 여진, 몽골, 거란의 영향을 받아야 했다.
유목민 제국의 압권은 단연 징기즈칸의 몽골이다. 저자 공원국은 누군가 “징기즈칸은 위대한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분명 강했지만 위대한 인간은 아니었다.”, “몽골제국은 위대한가?”라고 묻는다면 “제국은 분명 거대했지만 제국이 파괴한 것은 그보다 훨씬 컸다. 제국이 이룬 수많은 성취를 인정하더라도, 그 역사는 길고 거대한 파괴와 그만큼 더디고 어려운 과정이었다.”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다만, 파괴와 살육으로 초원과 바다에 모두 길을 낸 몽골제국 탓에 광대한 영토 전역에 깔린 역참 사이를 매일 수천 수만 마리의 말이 바그다드에서 한반도까지 뛰어다니며 소식과 문물을 전함으로써 인류 발전을 견인했다. 저항시인 이육사가 ‘내 고장 칠월은 /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라 노래할 수 있었던 것도 청포도가 실크로드를 따라 한반도까지 들어온 덕분이었다.
잔인하고 파괴적이었던 몽골에도 불구하고 유목세계의 또 다른 원리는 ‘자유, 공유, 환대’이다. 유목민은 감옥을 짓고 관리할 수 없는 환경 탓에 노예가 없었다. 광활한 초원은 다툼보다 공유를 가능하게 했고, 축적이 없기에 남녀 역할도 정주민보다 평등했다. 1937년 기차에 실려 이역만리로 옮겨온 고려인에게 음식과 터전을 내주며 환대한 이들도 카자흐스탄인들이었다.
《인문학자 공원국의 유목문명기행》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고대에서 근대까지, 정주문명에서 유목문명까지 훑어보는, 방대한 유목민 역사문화 탐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