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주행차 전쟁에서 전통의 자동차 메이커들이 앞서는 이유
이제 막 실험중인 자율주행차를 빨리 보고 싶은 사람들은 아마도 실리콘밸리를 주목할 거다. 언론들은 구글이나 우버, 테슬라 등 하이테크 기업을 자율주행차의 선두주자로 내세운다. 실제로 기술면에서 앞서기도 했다. 자동차 그 자체가 소프트웨어 플랫폼이 되다보니 실리콘밸리의 기술력 그 자체가 산업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애플이 자율주행차 경쟁에 뛰어들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실리콘밸리는 이렇게 얘기한다. “앞으로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은 실리콘밸리가 이끌 것이다”라고.
그런데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자. 기술이 엄청나게 뛰어난 회사가 자율주행차를 개발했다. 그런데 생산된 자율주행차를 아무도 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왜냐면 자동차 산업은 너무 거대한 생태계를 갖고 있다. ‘개발’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소비자가 선택해 운전대를 잡게 만들려면 기술력 뿐만 아니라 마케팅, 유통, 판매, 광고, AS 등 다양한 요소들이 고려돼야 한다. 이 모든 걸 포함시켜 따져봤을 때도 실리콘밸리가 여전히 앞서나간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시장조사기관인 네비건트 리서치(navigant research)가 재미있는 보고서를 하나 내놨다. 완전 자율주행차를 개발하는 18개 회사의 역량을 종합적으로 평가했다. 단순히 기술력만 고려하지 않고 제품 전략, 생산력, 내구성, 판매, 마케팅, 유통 등 9가지 기준에 따라 순위를 매겼다. 일종의 종합 평가인데, 이 모든 걸 고려한다면 자율주행차 시장의 주도권은 누가 쥘 거라 예상할 수 있을까.
1~5위 모두 자동차 메이커가 차지해
의외로 실리콘밸리가 아닌 포드가 1위, 제너럴모터스(GM)가 2위에 자리하는 등 전통의 자동차 메이커가 자율주행차 개발 레이스에서도 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3위부터 5위도 르노-닛산, 다임러, 폭스바겐 등 우리가 잘 아는 자동차 메이커들이 자리 잡았다. 실리콘밸리에서는 구글의 자율주행차 개발을 담당하는 자회사격인 웨이모(Waymo)가 6위에 자리했고 테슬라가 12위, 우버는 16위로 밀렸다. 자율주행차에 매번 등장하는 웨이모, 테슬라, 우버에 세상의 시선이 쏠리면서 전통의 자동차 기업들은 미래에 뒤늦게 쫓아가는 후발주자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준비가 꽤 잘 돼 있다는 얘기다.
이 보고서의 결과가 보여주는 건 ‘기술’만 따지지 말라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자율주행차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력은 중요하지만, 그런 자동차를 대량으로 시장에 유통시키고 판매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 총체적 역량이 중요하단 뜻이다. 포드와 GM은 기술에서 모두 80점대 초중반의 점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들을 최상위권으로 끌어올린 건 그들이 20세기부터 구축해 가장 잘하는 능력 탓이다. 테스트와 생산, 마케팅, 유통, 판매의 강점이 부각됐다.
동시에 이들은 약점도 보완 중이다. 포드는 앞으로 5년간 자율주행차 스타트업에 10억달러(1조1000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인공지능 스타트업인 아르고AI(Argo AI)가 대표적인 예다. 구글 자율자동차 프로젝트 출신 브라이언 살레스키와 우버의 엔지니어로 일했던 피터 랜더가 창업한 회사인데, 포드는 아르고AI를 자회사로 편입했다. GM은 지난해 10억달러를 들여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기업인 크루즈(Cruise)를 인수했다.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웨이모를 보면 기술면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획득했지만, 반대로 다른 부문들은 약점이 됐다. 생산, 전략, 영업, 마케팅, 유통 등에서 자동차 메이커와 경쟁이 안 된다. 그건 웨이모 역시 잘 알고 있는 부분이라서 자동차 메이커와의 제휴로 돌파하려고 시도 중이다. 웨이모의 기술을 자동차 메이커의 하드웨어에 설치한다는 전략이다. 최근 웨이모는 일본의 혼다와 제휴설이 나왔는데, 아직 구체적인 결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실제 미국 도로에서 자율주행차 테스트 주행을 하면서 주목받았던 우버도 비슷한 상황이다.
전략에 앞서는 실리콘밸리, 실행 능력에서는 크게 뒤처져
오토파일럿을 탑재한 자율주행모드 자동차를 내놓은 테슬라는 그나마 자동차 메이커로서의 위상도 갖고 있는 편이다. 엘론 머스크라는 강력한 리더가 존재하고 이미 시장에 진입했다는 점은 장점이다. 반면 생산 외 부분에서는 낙제점을 받았다. 현재 시판되고 있는 테슬라 차량의 AS는 불편하며 세계 주요 시장에 판매망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의외로 기술에서도 테슬라는 낮은 점수를 받았는데 네비건트 리서치 측은 "엘론 머스크는 전문가들이 완전 자율주행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는 라이다(LiDAR) 기술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테슬라는 그동안 차량 외관에 라이다(LiDAR) 장치 대신 카메라를 탑재하는데 관심을 보였다.
그럼 우리 자동차 기업은 어디쯤 위치할까. 유일하게 현대차만 포함돼 있는데, 이번 보고서에서는 10위에 이름을 올렸다. 1~3위 업체가 '리더'(Leaders)라면 현대차는 리더를 쫓는 '경쟁자'(Contenders)에 그룹에 자리 잡았다. 웨이모를 제외한 테슬라나 우버보다 높은 순위였다. 실리콘밸리 기업과 비교해 전략 면에서는 뒤졌지만 실행 능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번 네비건트 리서치의 보고서는 아직 여물지 않은 산업에 관한 결과다. 장기 레이스의 초반이기에 언제든 결과는 바뀔 수 있다. 지금의 경쟁구도가 그대로 갈 리도 없다. 합종연횡이 일어나면서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부각시키는 시도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벌어질 일이다. 다만 '혁신'을 상징하는 실리콘밸리의 기술처럼 ‘역사’를 대신하는 기존 기업의 시스템 역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