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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한국 사회는 미국 사회학자 피터 버거가 남긴 명언(真理)을 곱씹게 한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대로 세상이 존재한다”는 명언 말이다. 피터 버거는 후일 토머스 루크만과 더불어 ‘사회실재론’(사회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입장)과 ‘사회명목론’(사회는 이름 혹은 개념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대체할 제3의 입장으로, 사회는 개인의 해석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사회구성론’을 제시하면서 명성을 얻은 바 있다. 일례로 ‘누가 비행 청소년으로 낙인찍히는가?’에 대한 사례는 사회구성론을 보다 실감 나게 설명할 때 종종 동원되곤 한다. 가령 교실에서 도난 사고가 발생할 경우, 마침 돈을 훔친 학생이 하류층 출신으로 밝혀지면 예외 없이 비행이나 일탈 청소년으로 낙인을 찍고,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거나 보호감호소로 보낸다. 반면 중류층이나 중상류층 가정 출신이 도난 사건의 주인공으로 밝혀지면 ‘어쩌다 실수했을 것’이라 짐작하고, 타이르거나 부모에게 인계하는 정도에서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난이라는 동일한 행위가 비행 및 일탈로 간주되기도 하고 단순한 실수가 되기도 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가치관 등에 따라 사회 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라는 것이 버거와 루크만의 주장이다. 결국 사회는 개인의 해석 혹은 재해석 과정을 거치면서 구성된 결과라는 이야기다. 
3월1일 서울 광화문에서 경찰 차벽을 사이에 두고 탄핵 반대 집회(사진 왼편)와 탄핵 촉구 촛불집회(사진 오른편)가 열렸다. ⓒ 사진공동취재단

최근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이 존재함’을 실감케 하는 사건들이 줄을 잇고 있다. 박근혜 전(前)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는 민주주의의 승리이자 법치주의의 쾌거라는 시각과, 실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음모론의 결과라는 시각이 대립하고 있고, 세월호 인양을 둘러싸고도 ‘너무 늦어 미안하다. 이제라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와 ‘왜 하필이면 대선(大選)을 앞둔 지금이냐’는 목소리 또한 충돌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통령 탄핵 당일 화제에 올랐던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의 헤어 롤 2개를 두고도 ‘자신의 역할에 얼마나 몰두했으면 그랬겠느냐’ ‘헌신적으로 일하는 여성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단순한 실수를 미화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이를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회 분열과 집단 갈등의 정도가 그 어느 때보다 넓고 깊어지면서 우려의 목소리 또한 높아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하고, 동일한 잣대로 판단하며, 일사불란하게 행동에 옮기는 사회를 그 누군들 바람직하다고 하겠는가. 그보다는 다양한 생각이 공존하고, 서로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실천 방식 또한 다채로운 사회가 민주적이고 성숙한 사회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사회통합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integration’은 일사불란하게 하나가 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협상하면서 공통의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의미가 강함을 기억할 일이다. 이 대목에서 피터 버거가 남긴 또 다른 명언을 상기해 봄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인간은 모두 사회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이다. 단 우리는 교도소를 탈출할 수 있는 열쇠를 갖고 있다.” 감옥을 탈출할 열쇠라는 은유는 근거 없는 고정관념과 왜곡된 편견의 굴레에 갇힌 채,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진실이라 믿는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의미 아닐까?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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