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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현 前 회장 전격 사퇴 배경에 ‘홍라희의 분노’ 있다는 증언 이어져

 “홍진기 사장은 나의 사돈이면서 고락을 같이한 동지라고 생각한다. 중앙매스컴(중앙일보·TBC)의 운영에서 나는 기본방침만을 정하는 데 그치고, 일체를 홍 사장에게 일임했다. 신문·방송의 운영 전체를 책임지고 그는 성심성의 심혈을 기울여왔다. 홍 사장만큼 나를 이해해 주고 협력해 주는 사람도 드물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구술(口述)을 토대로 쓴 자서전 《호암자전》에 실린 글이다. 이병철 창업주와 홍진기 전 중앙일보 명예회장은 살아생전 서로를 가리켜 ‘평생을 함께할 지기(自己)’라고 칭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이 창업주가 3남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홍 전 회장의 맏딸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을 혼인시켜 두 집안을 ‘혼맥’으로 이으려 했던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홍 전 회장이 1967년 5월 이건희 회장을 맏사위로 받아들이고, 이듬해 2월 중앙일보 사장에 오르면서 이씨 가문과 홍씨 가문 간 밀월은 본격화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과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 © 시사저널 포토·연합뉴스

 

‘모자 갈등설’에 무척 예민한 삼성

 이처럼 돈독했던 두 집안 관계가 최근 파경으로 치닫고 있다. 발단은 지난해 10월 중앙일보 계열사인 JTBC가 ‘최순실 게이트’를 폭로하면서부터다. 심지어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재계에는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이후 홍씨 가문이 삼성을 접수하려 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마저 나돌았다. 진위 여부를 떠나 소문이 나온 것 자체가 두 집안 관계가 예전만 못하다는 방증이란 평가다. 탄핵 정국 초기, 삼성 주변에서는 중앙일보·JTBC 쪽의 보도 공세에 분노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외가에 서운함을 느낀 나머지 모친인 홍라희 전 관장과 갈등을 겪고 있다는 설(說)이 파다했다. 이런 상황에서 22년간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을 이끌어왔던 홍 전 관장이 3월6일부로 돌연 사퇴하자 소문은 현실로 바뀌는 듯했다. 현재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은 삼성문화재단 소속이며, 이사장은 이 부회장이 맡고 있다. 구도상으로 보면 아들이 어머니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틀 뒤인 8일 홍 전 관장의 여동생인 홍라영 총괄부관장마저 물러나자 논란이 증폭됐다. 홍 관장 사퇴야 아들 구속에 따른 안타까움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리움미술관을 실질적으로 운영해 온 홍 총괄부관장의 사퇴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홍 총괄부관장의 사퇴 이유는 ‘외가에 화가 난 이 부회장이 직접 지시했다’와 ‘언니인 홍 전 관장이 친정에 서운함을 표시하는 차원에서 물러나게 했다’ 등 두 가지로 압축됐다. 전자가 이씨와 홍씨 집안 간 갈등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홍라희-홍석현(전 중앙일보·JTBC 회장) 남매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초창기만 해도 일련의 사건을 놓고 이 부회장과 홍 전 관장 간 ‘모자(母亲和儿子) 갈등’으로 보는 시각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실제 아들이 구속된 지 한 달가량 지난 3월16일에야 홍 전 관장이 이 부회장 면회차 경기도 의왕시에 위치한 서울구치소를 찾아갔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모자 갈등설’이 확산됐다. 여기에 한겨레가 3월17일자로 보도한 ‘어머니 내친 이재용…삼성가 내홍 불거진 리움 앞날은?’ 기사가 모자 갈등설을 더욱 확산시켰다. 한 종합일간지 미술담당 기자는 “기사를 작성한 한겨레 기자가 미술전문이라는 점에서 해당 기사는 미술계 시각을 많이 담고 있다”면서 “실제 지난해 3월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공들여 키워온 서울 태평로 플라토가 문을 닫은 것에 대해 홍 전 관장이 굉장히 아쉬워했다”고 설명했다. 플라토는 천재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 5개가 설치돼 있어 ‘로댕갤러리’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 소장은 “리움미술관이 삼성가(家) 소장품전과 기획전 위주의 미술관이라면, 플라토는 사대문 한복판에 세워진 신진 작가들을 위한 미술공간이라는 점에서 홍 전 관장의 애착이 남달랐다”고 설명했다. 플라토 폐관에 대해 삼성은 “삼성생명 사옥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이었지만, 미술계에서는 “바로 옆 태평로 사옥에 별도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도 이를 없앴다는 것에 대해 홍 전 관장이 크게 서운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에서 중앙일보 향해 큰 불만 쏟아내”

 삼성 측은 3월17일자 한겨레 보도에 대해 강력 부인하고 나섰다. 보도 직후 삼성전자는 홍보용 공식 블로그 ‘삼성전자 뉴스룸’을 통해 “홍 여사와 이 부회장의 갈등은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하다”면서 “삼성전자와 삼성문화재단은 사실무근인 내용을 기사화한 한겨레의 보도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한다”며 이례적으로 강하게 반발했다. 관련 사실을 재단이 아닌 삼성전자가 적극 반박하고 나선 것도 이례적인 모습이다. 삼성이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왜일까. 일단 삼성 입장에서는 모자 갈등설이 확산될 경우, 삼성에 대한 비판 여론이 다시 고개를 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여기에 현재 진행 중인 최순실 게이트 재판 결과에 따라 삼성의 지배구조가 큰 격랑에 휩싸일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고민도 있다. 최악의 경우 이 부회장이 실형을 선고받게 되면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직을 유지할 수 없다.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직도 마찬가지다. 이들 재단은 일개 공익법인이지만 삼성의 순환출자 구조에서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어, 경영권을 넘겨받고자 하는 이 부회장 입장에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곳이다. 아직 섣부른 해석이지만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사망할 경우, 지분의 상당 부분은 홍라희 전 관장이 넘겨받게 된다. ‘모자 갈등설’의 밑바닥에는 이러한 상속 셈법이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의 삼성그룹 내 역할을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자간 갈등이 형제간 갈등으로 번질 거라는 시각인 것이다. 하지만 삼성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로열패밀리 간 갈등이 표면화될 가능성은 낮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외가 쪽의 섣부른 행동으로 그룹이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이 부회장 형제들이 집안 다툼을 벌일 가능성은 낮다.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이씨가 아닌 다른 성(姓)씨 사람들의 행동반경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홍씨 집안을 가리키는 대목이다. 최근 기류는 ‘모자 갈등’에서 삼성 집안과 홍씨 집안, 더 자세히 말하면 홍라희-홍석현 ‘남매 갈등’으로 바뀌는 양상이다. 한 중앙일보 고위직 출신 인사의 설명이다. “지난해 삼성 관련 의혹이 불거졌을 때 이재용 부회장이 어머니에게 ‘외삼촌을 좀 말려 달라. 어쩌자고 문제를 키우는 거냐’라며 강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이에 홍라희 전 관장이 홍석현 전 회장에게 몇 차례 전화를 걸어 우려를 표했지만, 끝내 아들이 구속되면서 남매 관계가 파탄 났다.” 이런 가운데 홍 전 회장이 중앙일보 자매지인 중앙선데이 창간 1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누이(홍 전 관장)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누이가 카톡을 보냈는데 가슴이 찢어진다고 하더라”라고 말한 대목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휴대전화 문자 속에 동생(홍 전 회장)을 향한 누이의 불만이 담겨 있지 않았겠느냐”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홍석현 대권 욕심에 집안 분란만 키워”

 사실이라면, 홍 전 회장의 중앙일보·JTBC 회장직 사퇴는 그 연장선상으로 봐야 한다. 한 중앙일보 관계자의 설명이다. “중앙일보 내부에서는 홍 전 회장의 사퇴일(3월18일) 2주 전부터 ‘삼성가에서 중앙일보 쪽을 향해 큰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시점은 홍라영 전 총괄부관장이 물러난 시기와 겹친다. 당시 삼성 쪽에서는 ‘이 부회장이 법적인 책임을 진 만큼, 사태를 여기까지 몰고 온 중앙일보 측도 성의 있는 행동을 보여 달라’고 주문했으며, 홍 전 회장 사퇴는 그런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다른 시각도 있다. 회장직 사퇴를 홍 전 회장의 정치적 행보와 연결 짓는 분석이다. 최근 홍 전 회장은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 정운찬 전 국무총리 등과 잇따라 회동을 갖는 등 좌우를 넘나드는 광폭 정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재계에서는 홍 전 회장이 현실정치에 참여함으로써 두 집안 관계는 당분간 냉각기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또 언론계에서는 홍 전 회장의 사퇴로 중앙일보와 JTBC 경영권은 아들인 홍정도 사장이 물려받는 것을 기정사실로 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홍 전 회장이 지난해부터 민감한 정치적 발언을 쏟아낸 것은 오래전부터 현실정치 참여를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고 보는 관측이 많다. 삼성가와 홍씨 집안의 갈등은 중앙일보·JTBC뿐만 아니라 보광그룹 관계사들에도 적잖은 부담거리다. 위기를 겪을 때마다 삼성은 중앙일보와 보광그룹 관계사들에 ‘백기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두 집안 사이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직·간접적 지원은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 현재 보광그룹 관계사 중 홍석현 전 회장의 바로 아래 동생인 홍석조 회장의 BGF리테일을 제외한 나머지 회사들은 실적이 좋지 못하다. 둘째 동생인 홍석준 회장은 보광창업투자 대표를, 셋째 동생인 홍석규 회장은 보광그룹 대표를 맡고 있다. 보광창업투자는 2014년 2억3271만원의 당기순이익을 냈지만, 지난 2015년에는 18억976만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해 적자 전환했다. 보광그룹은 핵심 사업이었던 STS반도체가 워크아웃 중인 가운데, 수년간 영업난을 겪던 휘닉스파크가 중앙미디어네트워크로 넘어갔다. 삼성그룹 임원 출신 인사의 말은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 “당초 홍 전 회장은 중앙일보와 JTBC를 통해 우파와 좌파를 모두 아우르는 ‘탈이념 정치’를 표방하려 했다. 하지만 JTBC가 ‘최순실 태블릿PC’를 보도한 후, 정국 흐름이 예상치 못하게 ‘타도 삼성’으로 이어지면서 어정쩡한 상황이 됐다. 그 사이 형제들로부터 ‘쓸데없는 대권 욕심으로 집안 분란만 키우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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