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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무역주의·고립주의 경제정책은 시대 흐름.. 타성에 젖은 국내 기업, 발 빠른 변화 필요
겨울 초입에 때아닌 태풍이 불고 있다. 찻잔 속 돌풍에만 그칠 줄 알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가 미국 45대 대통령 당선을 위한 선거인단 확보에 성공했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후보의 백악관 입성 가능성을 높게 본 미국 언론은 충격 속에 트럼프 승리를 보도했고, 트럼프는 의기양양하게 미국을 가장 강한 국가로 만들겠다는 당선 수락 연설에 나섰다. 억만장자 아웃사이더 트럼프가 세계 경제 중심에 서게 된 순간이었다.
“한·미 FTA는 미국인 일자리 죽인 재앙”
트럼프는 미국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표방한다. 그는 미국이 그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자유무역협정(FTA)·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에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다수 국가들과의 자유무역 결과 제조업 공장 해외 이전, 무역수지 적자 등으로 미국인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특히 그는 한·미 FTA를 일컬어 “미국인 일자리를 죽인 재앙”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에는 러스트벨트(Rust Belt·미국 중서부와 북동부의 쇠락한 산업지대)의 블루칼라층 지지를 이끌어낸 영향이 컸다”며 “트럼프는 우리나라가 수출하는 제조업 제품 무역 때문에 이들 일자리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했고, 미국 노동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 같은 생각을 하는 트럼프가 당선된 이상 대미 수출 비중이 큰 우리나라로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고 진단했다. 실제 한국의 지난해 대미(對美) 수출 비중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3.26%였다. 한·미 FTA 발효 직전인 2011년 10.12%보다 약 2%포인트 늘었다. 더구나 트럼프는 중국산 제품에 대해서도 45%의 징벌적 상계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중국에 중간재 수출을 많이 하는 한국으로선 간접적인 영향도 감내해야 한다. 실제 한국 기업들이 느낄 미국 보호무역의 부정적인 영향은 더욱 큰 셈이다. 미국은 한·미 FTA 재협상, 반덤핑·상계관세 부과와 같은 무역 규제, 바이내셔널(Buy National·자국산 제품 및 서비스 사용 의무화 제도) 등 전방위적인 무역보호 방법을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 윤원석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정보통상지원본부장은 “트럼프는 한·미 FTA를 강력하게 비난해 왔기 때문에 한·미 FTA 재협상을 요청할 가능성이 높다”며 “미국 현지 기업들도 트럼프 집권 이후에 바이내셔널 규정이 강화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고 밝혔다.고심 깊어지는 철강·자동차·전자 업종
트럼프 정책으로 국내 대표 수출산업인 철강·자동차·전자 업종이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철강 업종은 이미 미국의 대표적인 무역보호 대상이었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9월 기준 미국 내 철강업계와 관련된 무역규제는 18건에 이른다. 이는 미국이 국내 기업에 내린 반덤핑 및 상계관세 가운데 40%에 해당한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 이 같은 무역 규제는 더욱 심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철강업계는 수출처 다변화와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이지만, 세계 2대 철강 수요국인 미국에서의 점유율 축소는 타격이 크다. 자동차 업종도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 편치 않다.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전체 자동차 수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현대차가 약 18%, 기아차가 약 25%다. 이들 기업은 미국 현지 생산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 판매량 중 절반이 수출 차종이기 때문에 피해가 불가피하다. 이마저도 현지 생산 비중이 54.5%로, 주요 경쟁 업체들의 현지 생산 비중 67% 수준에 크게 모자란다. 무역 규제가 심해질수록 경쟁력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더 큰 고민은 값싼 멕시코 노동력을 이용하려던 일부 기업 전략이 수포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포드의 멕시코 공장 설립을 비판하면서 멕시코산 제품에 관세 35%를 물리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기아차는 지난 9월 멕시코에 연간 40만 대 규모 공장을 완공하면서 생산한 자동차 80%가량을 미주 지역에 판매할 계획이었다. 멕시코에 진출한 자동차 부품업체들도 판로에 큰 차질을 빚게 됐다. 전자 업종 역시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를 경계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지난해 미주 지역에서만 각각 42조5042억원, 16조3963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는 두 회사의 연간 수출액의 3분의 1 수준이다. 특히 이들 업체는 미국에 수출하는 가전제품 대부분을 멕시코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트럼프가 멕시코산 제품에 대한 관세부과를 현실화할 경우 국내 업체들이 악영향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일각에선 트럼프의 강력한 보호무역 정책에 의구심을 표하기도 한다. 외교적인 한계, 미국의 정치적인 부담 등으로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은 1년 전까지만 해도 많지 않았다. 국내의 한 경영학과 교수는 “저성장 시대가 지속하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유럽 등지에서 자국 산업과 일자리를 위한 보호무역주의와 고립주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대표적인 예로 지난 6월 영국은 살아남는 방법으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택해 스스로 고립하기를 자처했다”며 “이러한 대외 환경 속에 단순히 수출로만 먹고사는 국내 기업들은 혁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졌다. 하지만 아직까진 국내 기업들의 변화는 미미한 수준으로 향후 국가 경제에 대한 우려가 더욱 깊어지고 있는 상황이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