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대 최고위급 외교관 태영호 공사 탈북 망명 파장

평양 핵심 엘리트층의 탈북 망명 사태가 김정은 정권을 뒤흔들고 있다. 해외공관에 주재하던 외교관과 외화벌이를 담당해 온 무역기관 간부의 이탈이 심심찮게 이어지더니 급기야 태영호 일가족 망명이란 메가톤급 시한폭탄이 터진 것이다.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근무하던 태영호 공사(55)의 망명은 역대 최고위급 외교관의 한국행이란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우선 북한체제를 대변해 온 고위급 외교관의 체제 이반이란 점이 눈길을 끈다. 태영호 공사는 김정은 체제의 핵·미사일 도발이나 인권유린 상황에 대한 유엔과 국제사회의 비판을 반박하는 소방수 역할을 해 온 인물이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입장을 바꿔 가족과 함께 평양을 등진 것이다. 둘째, 김정은 패밀리의 정보에 접근이 가능한 인물이란 점에서 우리 당국뿐 아니라 미 중앙정보국(CIA) 등 주변국 정보기관들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지난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형 김정철이 영국에 팝스타 에릭 클랩튼의 공연을 보러 왔을 때 그를 바로 옆에서 안내하고 보좌했던 인물이 태영호 공사다. 평양과의 조율 과정에서 김정철은 물론 김정은의 지시, 전달 사항 등 고급 정보를 상당부분 가지고 있을 것이란 얘기다.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태영호 공사(오른쪽)가 2015년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형인 김정철이 런던 에릭 클랩튼 공연장을 방문했을 당시 김정철을 안내하고 있다. © 뉴시스

격노한 김정은의 엘리트 정책 변동 예고

 셋째, 북한체제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이른바 항일 빨치산 혈족의 서울행이란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태영호의 부인 오혜선(50)은 북한 군부의 핵심인 오금철 총참모부 부총참모장(69)의 일가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오금철은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로 알려진 오백룡 전 노동당 군사부장의 아들이다. 김정은이 신임하던 혈통의 엘리트 일족이 탈북 보따리를 쌌다는 건 북한 내부에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넷째는 이번 탈북 사태가 엘리트 그룹의 김정은 체제 이탈 서막일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한 당국이 태영호 사태를 계기로 외교관에 대한 성분조사를 강화하고 가족동반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나섰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는 어렵다는 게 우리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미 해외문물에 눈뜬 젊은 엘리트 그룹이 어떻게든 새로운 삶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다. 특히 이번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부모들의 강한 신념이 탈북 사태를 촉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막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태영호는 런던의 서방 외교관들은 물론 외신기자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런던 주재 북한대사관의 외교관 일가족 망명 사실이 8월16일자 중앙일보의 첫 보도로 알려지자마자 외신들이 “태영호 아니냐”며 관심을 갖고 추적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태영호는 런던 지역을 중심으로 북한체제를 옹호하는 이런저런 강의를 종종 했고 이 장면은 유튜브에도 올라 있다. 2013년 런던에서 한 강연에선 “핵실험과 위성 발사 이후 우리에 대한 제재의 강도가 세졌다. 보통의 금전거래가 차단됐고 그들은 우리를 고립시키기를 원하고 있다. 무역도 차단됐다. 제재를 통해서 우리나라의 발전을 막고 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정책과 노선을 바꾸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제재로는 우리를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015년 11월 영국 공산당원에 대한 강연에선 김일성에 대한 존경심은 보였지만 김정은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태영호가 김정은의 핵·미사일 도발 등 비외교적 통치행보와 야만적인 공개처형 등 공포정치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란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국내 입국 탈북자 지난해보다 16% 늘어나

 태영호 공사가 대외적으로는 북한체제 홍보를 맡으면서 내부적으로 대사관의 ‘군기 반장’ 역할도 했다는 전언이 나오면서 북한 체제가 받을 충격이 생각보다 클 것이란 분석이다. 이런 태영호가 탈북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던 직접적인 이유로는 지난 5월 7차 노동당대회를 앞두고 방북한 영국 BBC 기자의 북한체제 비판 리포트가 꼽힌다. 당시 북한 당국에 의해 추방된 BBC의 루퍼트 윙필드-헤이즈 기자를 검증하고 북한 당국에 추천했던 게 태영호였고, 이후 검열 과정에서 문책과 소환이 불가피해지자 탈북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태영호 공사는 부인·자녀와 함께 서울에 입국해 관계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당분간 국가정보원이 제공한 안가에 머물며 정부 합동신문 조사에 응한 뒤 한국 정착을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될 것이란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태 공사의 경우 김정은의 노선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점에서 북한 당국의 테러 표적이 될 수 있다. 우리 당국이 그의 신변보호에 각별한 공을 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기간 밀착경호가 이뤄질 것이란 예상이다. 집권 5년 차에 접어든 김정은으로서는 탈북자 문제가 체제 존폐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는 부담을 안게 됐다. 2012년 권력을 잡은 이후 탈북자 단속에 역량을 집중했고, 한국행 숫자가 줄어드는 일부 효과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올 들어 7월말 현재까지 국내 입국 탈북자 숫자가 지난해 동기 대비 15.6% 늘어나는 등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