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2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김대중이라는 이름이 저자로 새겨져 있는 옥중 수고 출판물을 읽으면서, 나는 그 저자의 문화적
식견과 안목에 제법 깊은 이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가 대통령이 된 뒤 사저의 책2만여 권이 청와대로 옮겨지는 장면은 지난번의 인상 위에 또
하나의 싶은 이상을 올려 놓았다. 나아가 야만과 그리 멀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각종 문화 행정이나 정책이‘개명’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가져
봄직했다.
하지만 문화관광부를 비롯해 정부의 관련 부처가 속전속결로 밀어붙여 그 작전 임무를 무사히 완결한 문화 관련 기구 책임자 선정
과정과 결과를 보면, 책의 주인과 책 내용의 주인이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한다. 새천년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 · 영화진흥위원장 ·
국립현대미술관장 · 문예진흥원 사무총장 · 통합방송위원장 들의 면면을 보면, 유신 정권이나 전두환 군사 정권 등 그 지긋지긋한 시절의 문화
관료들 동창회를 보는 듯해서이다. 대통령은 그 동창회에 대한 정부 인정서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쓰고 있다. 그 사인은 현 대통령의 문화적 안목이
전임 대통령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전혀 부끄럼 없이 자인하는 의례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그렇다.
이번 문화 고나련 기구 책임자 인사를 형식적으로만 보면 대채롭기까지 하다. 임명 · 호선에 의한 선출, 문화 관료 출신, 민간
전문인 등등 여러 요소가 서로 짝을 맞추어 구성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내용에 한발자국만 들어가 보면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다시
말해 군홧발로 문화의 모든 것을 진압하던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영화진흥위원장을 사례 중의 하나로 들어볼까? 그는 왕년에 잘 나가던 문화 관료였다. 유신 정권 말기 때부터 전두환 정권 때까지
모든 문화를 감시와 통제의 관점으로 도륙하던 문공부의 기획관리실장이었다. 그 자리가 해당 부처의 서열 3위이고 보면, 문화 영역에 관한 한
박정희나 전두환의 철권을 방불케 하는 요직 인사였던 셈이다. 나는 그 사람의 인간성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화진흥위원장에 선출된
박종국씨가 그런 자리를‘무난하게’수행하던 인물이라는 점을 확실히 기억하자고 권고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야만적인 검열이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그는 충정과 신념에 의한 행동이었다고 강조할 수 있다. 그것까지 접수하겠다. 비도덕적인 절대 권력에 대한 그 어떤 질문과
비판도 완벽 봉쇄하고, 왕년의 문과공보국장이 말한 대로‘우리나라는 북괴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영화감독도 싸우면서 건설하고 건설하며 싸워야
하는 일’에 일로 매진해야 한다는 확신도 그의 신념의 소산이라 해두자. · ·
문성근 시범 케이스로 벌써 저격? 그러면 이제는 그의 신념이 바뀌었는가. 유신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 때의 그 야만적인 문화
억압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수많은 영화인들과 같은 생각으로, 그 역시 자신의 과거 신념에 대해 철거 계고장을 공개적으로 보낸 적이
있는가. 많은 영화인들은 그 계고장을 본 적이 없다. 문화 영역에서 마치 야전 사령관 같은 위치에 서서‘반정부적 · 반권력적’상상력에 대해 가차
없이 사격 명령을 내리던 자리의 수행자가 다음 세기의 영화 진흥을 책임지는 자리의 수행자가 되다니, 끔찍스러울 분이다. 그러니 영화인들이여
조심하라! 언제 다시 총 맞을지 모른다. 민주적인 과정에 의해 선출된 하자 없는 인사라고? 백주에 목 죄던 방식에서, 은밀한 저격으로 그 방법만
바뀌었거니와, 문성근은 시범케이스로 벌써 저격되지 않았는가.
문화 관광부장관이 낙점한 오광수 신임 국립현대 미술관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미술계가 지적하고 신문이 보도한 것처럼
오광수씨가 전두환 정권초기에 미술계의 여러 사람들을 빨갱이‘혐의’로 고자질하는 데에 한 몫을 했다면, 그 경력은 지구상에 남아 있는 독재 권력
국가에서나 빛날 경력이지 만주주의와 개혁을 말하는 이 나라에서는 반짝이는 경력이 되지 못한다. 매카시즘에 동원되어 동료를 고자질한 미국의 어떤
인사가 그 행적을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일은 본 적이 있어도, 오광수씨가 그런 사과 발언을 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새천년기념사업회 · 문예진흥원 등의 인사에서 드러난 문제도 동궤의 것이다. 하기야 이런 것을 욕할 처지도 못된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공약이 하나하나 퇴장하고 있는 중이니, 우리는 오히려 현정부의 비개혁 프로그램의‘일관성’에 만장의 박수를 보내야 옳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