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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 재산권 장남이 독점, 상솔 불리… 가부장 · 남성 중심 가족관으로 억압

유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까지, 아니 유교가 이 땅에 완전히 뿌리 내리기 전까지만해도 한국에는 형제가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이른바‘윤회봉사(輪回奉事)’이다. 이 때에는 심지어 아들이 없으면 시집 간 딸이 제사를 받들기도 했다. 유교가 뿌리 내리면서 이같은 풍습은 사라지고 제사는 반드시 장남과 종손이 받드는 이른바‘제사권 종손 독점 시대’로 접어들었다.  조선시대 초까지만해도 부모의 재산 상속은 모든 자식들에게 비교적 균등하게 이루어졌다. 물론 자식 범위에는 딸이 포함된다. 그래서 여성은 시집가면서도 재산 상속분 중 자기 몫을 가져갈 수 있었고, 그것을 그대로 갖고 있다가 죽을 때 자기가 원하는 자식이나 사람에게 물려줄 수도 있었다. 이같은 재산 상속 풍습 역시 유교가 뿌리 내리면서 사라졌다. 최근까지도‘불균등 분배’가 당연시되었던 재산 상속 방식은 이런 과정을 거쳐 확립되었다.  제사권과 상속권이 장남에게 독점 및 집중된 현상은 유교 문화가 여성계에 뿌려 놓은 대표적인 악습 항목으로 꼽힌다. 그리고 이같은 관습을 가능케 했던 것은 유교문화가운데에서도 좀더 구체적으로는 법치보다 덕치와 예치를 중시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원리에 있었다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지적이다.  유교 문화를 논할 때, 적어도 이같은 유교적 관행이 여성들에게 끼친 부정적 영향은 백번 양보해도 용인할 수 없다고 여성계는 입을 모은다.

호주제 · 남아선호, 당장 버려야 할 구습
 유교사회, 특히 조선시대 사회에서의 통치 단위는 가족이었다. 그리고 가족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는 단순한 종교적 의미 이상의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것이 문화인류학자들의 얘기다. 즉, 조선시대는 제사를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의 하나이자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는“조선왕조 5백 년의 정치사는 철저하게 가부장제 사회질서를 강화한 과정이었으며, 이와 동시에 여성들을 사회전면에서 철저하게 배제한 역사다”라고 잘라 말했다.

 조선시대 사회가 가족을 통치단위로서 얼마나 중시했는가 하는 점은 친족 집단에 부여한 자율성으로 확인된다. 조선시대에는 일반 법률을 가볍게 위반했을 경우, 친족 집단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징벌하도록 했다. 반면 국가는 한 집안이 양자를 들이는 일이나, 효자 · 열녀를 현향하는 일에까지 직접 간여했다.  조선시대에 가족과 국가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을 맺었는가는 항공대 최봉영 교수의 연구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최교수는 조선시대 유교 문화의 한 특징으로‘가(家)중심의 가치 체계’를 들었다. 가는 다시 사회 조직으로서 본가 · 외가 · 유가 · 농가 · 국가 등으로 나뉜다. 이 중 핵심은 본가인데, 이는 단순히 가정이나 가문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과 가족, 생업으로서의 가업과 가산, 행위 규범으로서의 가례와 가규, 조교로서의 가통과 가묘, 역사로서의 가보(家譜)와 가승(家乘)을 모두 포괄하는 완결된 구조다. 부부라는 기본 단위로 시작하는 가는 종국적으로는 국가 조직으로까지 연장된다. 바로 이같은 측면에서 조선 시대 국가는 곧‘일반 가정의 확장된 형태’로 나타난다.

 가부장 중심 · 남성 중심의 유교적 가족관은 오늘날에 까지 살아남아 사회 곳곳에 영향을 주고 있다. 호주제와 남아 선호가 그 중 대표적이다. 한 여성학자는 공적 영역에서 여성 참여율이 외국에 비해 훨씬 더 떨어지는 점을 예로 들어, 한국 사회가 여전히 가부장적 남성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적어도 가족주의와 성 차별에 관한 한 한국의 유교는‘당장 버려야 할’자랑스럽지 못한 유산인 것이다.                  
朴晟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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