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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마리코 한국어 시집 《입국》펴내… 꾸밈없는 내용 ‘수준작’ 평가

일본인이 쓴 한국어 시집 《입국》을 들고 일본에 입국한다. 최근 민음사를 통해 시집을 펴낸 일본의 넒은 ‘한국어 시인’ 사이토 마리코(33)씨는 오키나와에 산다. 그의 시집은 ‘지도 없이/해도 없이/지상에서 이미 시작된/섬으로 가는길’이란 문장에서 끝난다. 오키나와는 섬이다. 일본 최남단의 이 섬은 늦가을 옷을 입은 한국인에게 아열대의 더위를 훅 끼얹는다. 11월이지만 낮기온이 섭씨 25도를 오르내린다.  사이토 마리코의 시집 《입국》은 한국문학이 외국인에게 처음으로 발급한 ‘비자’이다. 모국어는 우리만의 것이라며 모국어의 가장 안쪽에서 그 결과 무늬를 다듬어온 한국 시인들에게 그의 ‘입국’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사이토의 시는, 시집이 발간되기 직전인 지난 여름 계간지 《세계의 문학》에 처음 발표되었다. “시인이 외국 사람이기에 처음에는 번역된 것이려니 했었다”는 문학평론가 이경호씨는 “그 일본 시인의 작품을 읽어내려가다가 갑자기 눈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고 시집 해설에서 밝히고 있다.  그것은 ‘낯선 모국어의 아름아운 풍경’이었다. 억지를 부리거나 쥐어짜지 않는, 수필 같은 시였다. 평론가들은 이 시집이 올해에 묶인 시집가운데 상위권에 속하는 수준작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한국 역사에 대한 그의 언급을 ‘간섭’으로 여기며 언짢아하는 시각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 · 일본 경계에 선 ‘무국적’ 시인
 사이토의 시집 《입국》은 어쩌면 불행한 시집인지도 모른다. 시인이 일본인이 아니었다면 다른 반응이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미묘하기만 한 한 · 일 관계의 가운뎃점에 위치하면서 문학 외적인 방해를 받는다. 그는 한국 독자가 갖고 있을 위와 같은 불편함을 이미 읽고 있었다. 시집 서문에 ‘이곳을 떠나며 나에게 많은 시를 쓰게 해준 이 땅에 이 책을 두려운 마음으로 바친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이 본 서울과 한국을 시집에 나와있는 그대로 읽어주었으면 한다. 하고 싶은 말은 시집에 다 썼다”라고 그는 말했다. 한국에 대한 일방적인 찬사나 비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複眼이란 단어를 예로 들면서, 대상을 바라볼 때 여러 가지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보편성과 독자성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입국》은 이방인, 아니 경계에 선 자가 바라본 한국과 한국인이다. 일본해도 아니고 동해도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려고 하는 ‘무국적’의 시각이다. ‘문의 입장은 중립적이다’라고 그가 썼듯이 출구도 아니고 입구도 아닌 문과 같은 자리, 즉 ‘사이’(間)에 그는 서있다. “고향과 모국어를 지킬 권리도 있지만 그것을 버릴 권리도 인간에게는 있다. 나는 이방인의 삶을 선택했다”고 그는 말했다.  어느 한쪽으로도 경사되지 않는 눈길로 그가 바라본 한국 · 한국인은 나무와 윤동주로 상징되는 역사와 한국만의 유별난 시대 상황, 그리고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에서 번역이 불가능한 침묵으로 압축된다.  연세대 교정에 있는 윤동주 시비 앞에서 ‘저는 당신의 종점으로부터 걸어왔습니다’라고 그가 시 <비오는 날의 인사>를 쓸 때 거기에는 한국 근대사가 스며들고, 그의 개인사가 배경음으로 깔린다. 그 역사가 그로 하여금 한국어를 배우게 했고, ‘당신(윤동주)의 말’인 한국어로 쓴 시집을 내놓게끔 했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시 <비오는 나르이 인사>에서 그는 국경을 뛰어넘어 서로가 만날 수 있음을 꿈꾼다. ‘저의 부끄러움과 당신의 부끄러움은/서로 얼굴을 맞을 수 있는 것인가요’라고.

“황국사관 바로잡고 싶었다”
 사이토 마리코씨는 60년 일본 니가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이토 분이치씨(70)는 니가타 대학 물리학과 교수였는데 딸 둘만을 두었다. 그 두 딸은 아버지로부터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을 만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둘째딸인 마리코는 어릴 적에 유적이나 폐허를 유독 좋아하는 이상한 아이였다. 니가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의 삶에는 드라마가 없었다. 다른 구석이 있었다면 시를 즐겨 읽었다는 정도였다.

 명문 메이지 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해 고고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유적을 좋아한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하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고고학이 너무 사무적이어서 문학적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한국어를 공부하기로 작정한 뒤 대학 수업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학 2학년 대 황국사관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 사관이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얼마나 뒤틀어 놓았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재일교포 교수였던 이진희(고고학) 강덕상(근대사) 두 교수의 영향도 켰다.  “비슷한 점이 많은 형제 같은 민족이 피지배 · 지배의 상처를 남긴 것은 큰 불행이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황국사관(식민사관)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국 교포와 일본 친구들과 그룹을 만들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가 80년이었다. 당시 메이지 대학에는 한국어 강좌가 없었다. 한국에 유학해 한국문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일본 선배를 선생으로 모셨다. 그 선배는 아내가 한국 여성이어서 한국어 공부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처음 보는 한글은 모양부터가 매우 합리적이었다.  82년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그해 여름 부산을 거쳐 서울로 갔었는데, 부산에서는 승차거부를 당하기도 했다. 일본 역사 교과서의 왜곡 문제로 반일 감정이 극심했을 때였다. 3주 동안 머물면서 한국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고 작정했다. 문예지 《현대시수첩》에 일본어 시를 발표한 것이다. 고 채광석씨의 평론을 일어로 번역했으며 90년에는 첫 일어 시집《울림 날개침 눈보라》를 출간했다.  한국 유학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도쿄를 떠나고 싶어했다. 정보화 사회의 노예가 되는 것만 같았고 또 막 서른살이 된 것이었다. 91년초 한국을 다시 찾았다. “오키나와에서 돌아보니 서울에서 1년 3개월을 보낸 사람은 사이토 마리코가 아닌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걸음걸이조차 한국어 리듬에 맞아떨어졌고 그렇게 많은 시가 나온 것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런 적이 없었다.

윤동주 · 한용운 · 김소월 통해 입문
 윤동주 한용운 김소월을 통해 한국시를 처음 접했고 이어 김지하 정현종 황동규 강은교 오규원 최승호 황지우 이성복, 그리고 허수경과 고 기형도의 시들을 즐겨 읽었다. 한국시에는 일본시에 없는 무엇이 있었다. 그는 “일본시는 희로애락 가운데 노가 없다. 그러나 한국시에는 그 노가 있다”는 그의 선배 시인인 이바라키 노리코의 지적에 동감한다. “일본에는 서정 시인만 있고, 사회적 영향력도 한국에 비해 미약하다”라고 그는 말했다.

 한국을 떠날 때 그는 오키나와를 선택했다. 일본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오키나와는 일본에 속에 있지만, 일본은 아니었다. ‘류큐왕국’이라는 고유한 역사가 있고 2차대전 때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일본 패망 이후 미국의 지배를 72년까지 받았다. “오키나와와 한국은 역사적으로 오랜 교류가 있었고 일본과의 관계, 가족제도, 토속신앙 면에서 닮은 점이 많다”고 말했다.

 오키나와에서 혼자 사는 그는 프리랜서로 생활하면서 틈틈이 오키나와 역사와 중세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사이토 마리코씨는 “언젠가 한국에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겨울 해인사와 사물놀이, 그리고 대금이 그립다고도 했다.
오키나와 ● 李文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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