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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인파 속 性徹 스님 다비식… 불교계 “성철 증후군, 중흥 계기로 삼자”

性徹 종정은 보기 드문 큰스님이었다. 국내에서 사리가 제일 많이 나왔다는 점에서분만 아니라, 7일장을 치르는 동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부처’로서의 진면목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11월4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후 국민의 눈길을 열흘 이상 해인사로 쏠렸다. 국내외에서 모여든 기자 3백여 명은 성자가 된 큰스님을 그 눈길에 담아내기 위해 가야산 골짜기에서 취재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큰스님이 마지막 가는 길을 보려는 신도들의 발길도 그치지 않았다. 7일간 해인사를 찾은 조문객은 30만명,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서기802년)에 창건된 해인사를 이처럼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찾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지난 11월10일 큰스님의 다비식이 있던 날 가야산은 밀려드는 조문객들로 이른 새벽부터 북새통을 이루었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같은 먼곳에서 버스를 전세내 달려온 이들이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에 일주문에 이르는 길을 가득 채웠고, 밤을 새워 예불을 드리던 신도들이 대웅전에 넘쳐 밤이슬을 맞는 이도 많았다.

 아침 9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나 영결식장의 신도들은 꼼짝할 줄을 몰랐다. 무동을 세워 어린 아들이라도 영결식을 제대로 보게 하려는 젊은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젖은 땅바닥에 종이를 깔고 주저앉아 눈을 감고 염주를 굴리는 노인과 하염없이 흐느끼는 신도도 눈에 띄었다.

 3천여 스님과 10만 인파가 일시에 몰려들자 낮 12시부터 고속도로에서 해인사로 이르는 도로는 완전히 막혀버렸다.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버리고 온 신도들은 15km가 넘는 길을 서너시간 걸어야 했다 인파로 가장 큰 홍역을 치른 곳은 화장실. 여자 화장실 앞에서는 한 비구니가 “신도가 중 말을 안들으면 어떻게 해”라며 회초리를 들고 길게 늘어선 줄을 정리해야 할 정도였다.

성철 스님이 평소 모은 나무로 불쏘시개
 다비장으로 가기까지는 계곡과 봉우리 하나를 넘어야 했다. 큰스님 입적후 아예 천막을 치고 다비장에 살다시피 한 인부들은 높이 3m 둘레 20m의 연화대를 준비하기 위해 굴참나무를 평소의 배가 넘는 1백짐이나 해 날랐다. “불쏘시개는 큰스님께서 수의를 준비하듯 20년 동안 모으신 잡목들을 썼다.” 해인사 아래에 살면서 지난 40년간 모두 일곱차례 연화대를 준비했다는 김만수씨(60)는 “나무를 성냥개비 쌓듯이 정성스레 쌓았다”라고 말했다.

 2만여 신도가 들어서자 다비식장은 거대한 원형극장으로 변했다. 가파른 비탈을 기어올라 둥그렇게 모여 낮은 신도들은 석가모니불을 함께 독송했다. 오후 2시30분 “큰 스님 불들어  갑니다”하며 붙인 불은 쉽게 타오르지 않았다. 석유를 뿌리고 젖은 가마니 속으로 불길이 들어가게 할 때까지 가야산 중턱은 하얀 연기와 안개로 뒤엎였다.

신도들은 연화대와, 국화로 뒤덮인 영구차 주위를 탑돌이하듯 돌기도 하고, 비옷을 입거나 우산을 받쳐들고 스님들과 함께 다비장을 지켰다. “너무 많이 남아서 걱정입니다.” 밤늦게까지 다비장을 떠날 줄 모르는 1천여 신도를 바라보면서 한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비가 내려도 훨훨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큰스님 생전에 못한 3천배를 하려는 듯 진흙탕에 비닐을 깔고 몇시간째 절을 하는 신도도 있었다. 꼬박 하루를 타고 하얀 재로 변한 연화대 앞에서 독경 소리는 이틀밤을 지새우고 습골을 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큰스님의 한전 혈육으로서 임종을 지킨 불필 스님은 세속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멀리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울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나오라”는 말에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은 그는, 평소 기거하던 금강굴 너머 고갯마루에서 연화대의 연기를 볼 수밖에 없었다.

 성철 큰스님의 다비식은 많은 신도가 지켜보고 연화대가 화려하고 켰을 뿐, 작은 수님의 다비식과 다를 박 없었다. 화장장이 없는 작은 암자에서도 불을 붙이는 거화 · 하화부터 뼈를 고르고 재를 훝는 습골 · 산골에 이르기까지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백안 · 자운 스님 등의 큰 다비식에 여러차례 참석했다는 해인사 포교국장 시명 스님은, 화장과 장례의식을 모두 포함하는 다비식은 본래 부처님이 계실 당시에 있었던 인도 풍습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했다. 발리 상해서 구더기가 끓는 시신을 깨끗하게 하고, 타고 난 재를 갠지스 강에 뿌림으로써 승천을 한다고 믿는 전통에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무아사상이 겹쳐서 이 땅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성철 큰스님에게서 나온 사리는 지금까지 알려진 다른 스님에 비해 그 수가 월등히 많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나온 사리중 가장 많은 수는 53과(개)로 , 83년 12월에 입적한 구산 스님의 것이었다. 사리는 원래 석존의 유골 전체를 뜻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열롱한 구슬을 지칭해 ‘영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크기는 호두 반만한 것에서부터 녹두와 콩만한 것도 있다. 60년대에 입적한 효봉 스님은 34과, 70년대의 청담 스님은 8과, 지난해 열반에 든 해인사 자운 스님은 19과를 남겼다.

“초파일에 안 나가야 불교에 득 된다”
 큰스님의 오색영롱한 사리는 “성철 큰스님에게서 사리가 안 나오면 크게 실망할 것”이라는 어느 신도의 걱정도 해소시켰고, 습골과 사리를 끝까지 지켜본 신도들에게 참된 수행을 통한 정신적 결정체로 인식되었겠지만 불가에서는 사리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시명 스님은 “스님이 이 세사에 계실 적에 중생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한 사리이다. 눈에 보이는 사리를 가지고 스님의 전체를 평가하려는 태도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하면서, 사리가 나오지 않은 큰스님도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 지난 82년에 입적한 경봉 스님은 도인의 행적을 남겼으나 사리가 나오지 않았다. 스님은 입적하기 전에 “산하대지가 다 사리인데 왜 몸속의 사리만 찾으려 하느냐”라는 말을 나겼고, 큰스님이었던 전강 스님은 “죽은 뒤 사리를 찾아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옛 중국에서는 제왕들이 사리를 시험하기 위해, 6천도의 불에도 타지 않고, 4천근 이상의 무게에도 깨지지 않고, 또 물에 떠야 사리로 취급했다는 기록도 있다. 성철 큰스님은 국내 최다수의 사리로도 국민의 관심을 모았고, 또 한국 불교사에 지워지지 않을 큰 업적을 나겼지만, 열반에 들면서는 신도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까지 큰 신심을 불러일으겼다. 큰스님의 상좌승인 원택 스님은 초파일 때마다 큰스님께 이렇게 조르곤 했다. “여의도 법회에 나가시면 신도가 열배는 더 모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끔 나가 주십시오.” 병원 갈 때를 빼고는 평생 산속에서 수업만 해온 큰스님은 그 때마다 이렇게 불호령을 했다. “이놈아, 나가는 것보다 안나가는 것이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지를 아느냐. 두고 봐라. 나가는 게 불교에 득이 되는지 안 나가는 게 득이 되는지….”

“7일장 치르며 큰 영향력 실감했다”
 원택 스님은 7일장을 치르면서 “상좌승으로서 큰스님이 불교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셨는지 새삼 느꼈다”라고 말했다. 성철 큰스님의 열반은 불교 신도분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까지 ‘이 시대의 큰어른’을 잃는 아픔을 느끼게 했다. <불교신문>의 양범수 편집국장은 “불교계가 이토록 비상한 관심을 끈 적은 일찍이 없었다. 종정 추대 문제로 생겼던 불교계에 대한 일반인의 좋지 않은 인상도 불식되었다. 성철 증후군이라 불리는 이런 관심을 무너뜨리지 말고 불교 중흥의 방향으로 잘 이끌어야 한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라고 불교계의소식을 전했다.

30만명의 발길과 온 국민의 눈길을 모으면서 성철 큰스님은 홀연히 이승을 떠났지만, 그가 준 큰 가르침은 이땅에 새겨져 있다. 해인사내 서점인 연경당뿐 아니라 서울의 교보문고와 종로서적 등 대형 서점에는 그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지금도 줄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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